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추천설교 - 영적침체를 이기는 기도 - 시편강해 - (44). 절망 속에서 붙잡는 기도의 근거

시편 44:1-26, 로마서 8:35-39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19-09-11

말씀내용
오늘 이 놀랍고 깊은 감동을 주는 시편 44편 설교의 제목을 정하느라 고심했습니다. 이 본문을 주석한 학자들이나 설교한 설교자들이 시편 44편에 붙인 제목은 정말 다양합니다. 그래서 저도 주보에 실은 설교제목과는 다른 제목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는데, 그것이 [절망 속에서 붙잡는 기도의 근거]입니다.


1. 공동체 애가
이 시편은 1-8절만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찬송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9절이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시작하는데서 볼 수 있듯이,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됩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비참해진 상황, 그리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 전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리암의 탬버린 소리를 듣지 않고 라헬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23절 이하는 이 절망 속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그런 패배와 비참함과 절망 속에서 기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전체의 분위기는 앞의 1-8절은 과거 하나님께서 주셨던 승리의 회상이라면, 뒤의 9-22절은 현재의 패배에 대한 탄식의 절규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분류상 공동체 애가 혹은 국가적 탄식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애가는 시편에서 모두 11개가 나오는뎨(60, 74, 79, 80, 83, 85, 90, 94, 123, 137_낸시 드클라이세 왈포드), 그 첫번째가 44편입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경의 이야기들 혹은 시편을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욥의 이야기이고, 또는 시편 73편도 불경건한 자들의 성공과 경건한 자의 비참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개인적 차원의 기도였다면, 오늘 시편 44편은 공동체인 국가적 패배, 재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의 현실에서 국가적으로 큰 패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불렀던 노래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사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께서 더 이상 개입하지도 않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으시며 자신들의 비참한 패배를 그냥 바라만 보시는 듯 합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상황 속에서, 신자들이 계속 기도의 끈을 놓치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시편 44편은 공동체가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오늘날의 국가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교회에 적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세상의 비난을 받고 비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의 현실을 직면하게 될 때,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부당한 고통을 겪게 될 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시편 44편입니다.
이 시편과 얽힌 역사를 보는 것도 유대인들이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하고 싶은데 첫째는, 헬라 셀류코스 제국의 황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극심한 박해 아래 있던 주전 168-164년입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 준수 그리고 토라(율법) 낭독을 금지시켰고, 성전에서는 돼지를 제사지냄으로써 유대교와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이때 유다 마타티아스의 지휘 아래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당시 레위인들은 매일 시편 44:23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이런 국가적 재난의 상황,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재난에서 건져주시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시편을 노래했고 기도했습니다.
이 시편과 관련한 역사와 관련하여 두번째로 언급할 사건은,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1907-1972)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헌정하는 작품의 헌정문에서 이 본문 시편 44:17-19을 인용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 듣기—과거의 은혜(1-8)
본문에서 우리는 먼저 1-8절을 볼텐데, 이 문단을 뚝 떼어서 볼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시편을 쓰고 노래하는 형편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참담한 재난 아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 자체는 유쾌하고 한없이 긍정적인 분위기이지만, 이 시편을 읊조리고 있는 시인은, 혹은 백성은 절망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절망 속에서 옛날을 기억합니다. 그 옛날은 자신이 인생에서 경험한 옛날이 아닙니다. 그가 조상들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1절을 보지요.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물론 교회에서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 하나를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듣는 것입니다. 물론 할아버지나 할머니, 어머니 다 포함됩니다. 그들이 들려주었다는 것은 조상들이 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들었고, 할아버지는 증조 할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역사들은 역사 속에 묻혀지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기억되는 것입니다.
피터 크레이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가 현재에 언제나 유용하다는 것, 믿음의 백성이 미래적 영향을 잉태한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적의 연속성을 현재 이 순간 볼 수 있다는 것이 히브리 신앙의 정수였다.”
여기에는 또 하나 신앙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은 듣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 말씀이나(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거룩하게 변화한다는 말씀(고후 3:18)은 모두 들음을 강조합니다. 가정은 우리의 육신이 태어나고 자라는 환경일 뿐 아니라, 우리 영혼도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가정입니다. 부모가, 아버지가 들려줄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생애에 하나님이 어떤 구원의 역사들을 행하셨는지를 말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꼬집어 말합니다. “만일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에게 신앙적으로 벙어리가 된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무서운 말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아버지가 할 일은 그저 돈을 벌어다 주고, 학교와 학원을 보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게 하는 것이 다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여러분이 과연 그리스도인이 맞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바실(Basi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아버지들이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도록 유도하는, 그리고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도록 유도하는 일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태만하지 말라.”
2-3절을 보지요.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이것은 분명히 가나안에 들어오던 시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가나안의 백성들을 쫓아내셨고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내려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백성의 능력이 아니라 ‘주께서 주의 손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구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로 설명됩니다.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스펄전의 말입니다. “은총의 모든 강물이 흘러나오는 원천이 여기에 제시된다…최종적인 영광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 무엇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주권적이고 거저 베푸시는 은총에 달려 있다.”
이어지는 4-8절을 보면 가나안 정복과 같은 먼 과거에서 이제는 가까운 과거, 즉 이 찬송을 부르는 백성들, 이 시편을 노래한 시인이 경험한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린 것은 그들의 조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려왔습니다. 부르짖을 때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 하나를 보게 되는데, 4절과 6절에서 1인칭 단수가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백성들이 말하던 것을, 4,6절에서는 화자가 바뀌어 왕이 말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화자가 바뀌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과거 행위에 대한 시인의 간증(또는 고백)을 강조하기 위하여 훨씬 더 개인적으로 와닿는 화법을 쓴 것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옛적 조상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경험한 이야기라는 차원을 강조하는 화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시인의 의지가 6절에 나옵니다. 자기 활, 자기 칼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 강점, 장점을 가지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기 강점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다 자키 활, 자기 칼을 의지하라고 가르치고, 활과 칼을 갈고 닦으라고 말합니다. “모든 게 네 실력에 달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이것이 아이들이 공부하고 살아야 할 동기가 되도록 가르치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여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8). ‘종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아시는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종일 감동하여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마음, 이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레미야 9:23-24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기 활과 자기 칼을 의지하여 살라고 배운 삶은 평생 그것을 떠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종일 자기 활과 자기 칼을 자랑하며 소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자랑하도록 부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종일 자랑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9절부터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됩니다.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진짜 우리 신앙의 실력이 나타나는 지점이 거기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고 살아간다면, 거기에 감사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하지 않을 영혼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3. 현재의 낯선 은혜 속에서 (9-22)
제가 지난 가족수양회에서 전했던 두번째 말씀의 제목은 ‘낯선 은혜’였습니다. 이제 9-22절에서 우리가 보게 될 것이 하나님의 낯선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본 것은, 기대되었던 은혜입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에서 싸워주셨고 이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 그리고 기대에 딱 맞는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니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 상상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것을 가리켜 저는 하나님의 ‘낯선 은혜’라고 규정합니다.
9절을 봅시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구절에서 분위기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은 로마서 3:21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쓰인 바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본래 헬라어로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그전에 율법 아래서는 구원의 소망이 없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때문에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문맥상, 시편 44:9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승리와 은혜를 경험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과거와 현실은 다릅니다. 여기에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신다면, 그 결과가 참혹하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시므로 일어나는 결과들이 10-14절에서 이어집니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시 44:10-14).”
15-16절에서는 다시 1인칭 단수가 사용됩니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여기서도 4,6절에서 1인칭 단수가 사용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조금 더 집중해야할 부분이 나오는데, 17-2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17-21)”
시인은 자기 나라와 민족이 당하는 이 참담한 일들, 이 고난이 왜 자기들에게 주어지는지 모르겠으며, 자신들은 이런 고난을 초래할만한 잘못된 일, 즉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 차원이라면, 욥의 항변과 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국가적 차원의 일입니다. 그들은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습니다(17).
물론 이런 참담한 일들이 우리 인생에 혹은 교회에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잘못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신자는 자기의 무고함을 항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인이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21절은 자기의 무고함을 질문의 형식으로 항변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21).”
그리고나서 22절의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만일, 참으로 자신들의 결백이 확실하다면, 자신들이 받는 이 고난은 ‘주를 위하여’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제물로 희생되기 위해 구별된 상태로 기다리는 양들의 운명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양들은 ‘주를 위하여’라는 목적으로 구별된 양들입니다. 그 양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를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자신들이 현재 처헌 운명이 마치 이런 양들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6).” 신앙으로 인하여 핍박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고난은 너희의 잘못으로 겪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주를 위한’ 고난입니다. 성전의 양들이 그렇게 구별되어 줄지어 기다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신자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입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은, 하나님은 여전히 대답이 없으시며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원수들로부터 능욕을 받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낯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혀 자신들이 은혜를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삶의 현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 흘러갑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의 낯선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승리의 배후에 계셨고 모든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었듯이, 패배의 배후에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이 낯선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4. 절망 속에서 기도할 근거(23-26)
이런 시간이 길어질 때,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계속 기도 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기도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이 절망의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것이 23-26절입니다. “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44:23-26).”
여기서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라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으시고 깨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시인은 자신과 자신의 백성이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기에 이방 신을 조롱할 때 사용하는 말들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인이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26절입니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이것이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근거였고, 오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언약의 사랑 말입니다. 성도가 모든 절망의 순간에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 언약적 사랑입니다. 시인은 이 사랑에 근거하여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도움이 되어달라고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리라 확신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 근거입니다.
이 위대한 결론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고난 당하는 로마의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신자는 세상에서 매일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헤세드를 기억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말이지요. 아니, 우리가 주를 위하여 도살 당할 양처럼 죽임을 당하기 전에, 주께서 그 언약에 신실하신 주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도살 당한 희생양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