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성경장절분류 > 시편강해 - (42,43)A. 신자가 낙심할 때

추천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추천설교 - 영적 침체 - 시편강해 - (42). 신자가 낙심할 때

시편 42:1-43:5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19-08-21

말씀내용
신자가 낙심할 때 (시 42-43)

시편 150편의 시는 5묶음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각 묶음을 권이라고 표시하는데, 오늘부터 상고할 42편은 2권의 첫번째 시편으로 72편까지입니다. 1권과의 차이가 있다면, 1권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호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면(여호와 278회, 엘로힘 15회, 존 데이), 2권은 엘로힘이라는 성호를 주로 사용한다(엘로힘 200회, 여호와 43회)는 것입니다. 이것은 편집과 분류를 하는 사람이나 그룹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1권(1-41편)에는 처음 네 편을 제외한 37개의 시편이 다윗의 시로 돌려지는데(표제어), 2권(42-72편)에서는 18개만이 다윗의 시로 돌려지고, 아삽과 솔로몬에게 각각 하나, 그리고 고라의 자손에게 7개(43편을 고라의 자손의 시로 분류한다면 8개)가 돌려집니다.
오늘 우리는 42편과 43편을 함께 상고할텐데, 그 이유는 이 두 개의 시편이 본래 하나였을 것으로 대다수의 시편 연구가들이 추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보는 근거는 몇 가지 있는데, 첫째로 후렴이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42:5,11 그리고 43:5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42편과 43편은 모두 3연으로 된 한 편의 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도 동일한데, 두 시편이 탄식의 주제를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시편을 하나의 시편이라는 전제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먼저 표제어로 시작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두 편의 시가 본래 하나였다면, 42편에 있는 표제어는 43편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3편에 표제어가 없다는 것도, 42편의 표제어가 43편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표제어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구약 시대에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의 공적 노래(회중 찬송)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은 성가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거기에 지도자들을 임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배경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스길’은 아마도 교훈적 노래(Wisdom Song)를 일컫는 말로 보입니다. 마스길이라는 단어의 기본형이 ‘사칼’인데, 이 말은 ‘식견이 있다’ 혹은 ‘가르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마스길을 교훈적 노래라고 이해하지만, 그 의미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스길이 아닌 시편들도 역시 교훈적 내용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모두 14편의 마스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입니다. 고라는 우리가 아는 바, 광야에서 250명의 지도자들을 이끌고 모세와 아론에게 대반역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레위인이었고, 레위의 아들인 고핫 자손에 속한 것이 모두 모세와 아론과 같았으며 모세와 아론과는 사촌 지간이었기에, 모세와 아론만이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시기와 불만을 품고 반역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을 열어 고라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가족들까지도)을 삼키게 하셨습니다(민 16:31-33). 하지만 진노 중에서도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아들들 가운데 몇을 살려 두셨습니다(민 26:11). 그래서 고라의 대가 끊어지지 않았고, 후대에 고라의 자손은 성전 악장(찬송하는 자, 대하 20:19)과 성전 문지기(대상 9:17-19)로 섬겼습니다. 다윗 시대에 헤만은 고핫 자손(고라는 고핫의 아들)을 대표했고, 아삽이 게르손 자손을, 여두둔이 므라리 자손을 대표하여 성전 찬양대를 이끌었습니다.
시편에는 ‘고라 자손’과 연결된 시편이 42편과 43편을 포함하면, 모두 12편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고라 자손 중 누군가가 썼다는 뜻이라기 보다, 그가 편집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고라 자손은 이 노래(시편)들을 모으고 편집하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스펄전은 고라 자손의 시로 분류된 시편들도, 모두 다윗이 쓴 시편들이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편이 다윗의 저작임을 의심하기 보다는 차라리 천로역정 제2부의 저자를 의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문체와 내용이 다윗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시편의 본문을 상고해보겠습니다.


2. 영적 침체의 한 가운데서
시편 42-43편은 시편 23편과 함께 가장 사랑받는 시편에 속합니다. 특별히 다음의 구절들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는 구절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11; 43:5).”
이 내용을 기초로 지어진 노래들도 있는 것을 보면 이 구절들을 가진 이 시편이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이것은 또한 이 시편의 기도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는 기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이 두 세 구절만 보더라도, 이 시편의 분위기와 내용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시인은 만족스럽고 즐거우며 좋은 환경에서 이 시를 쓴 것이 아닙니다. 이 시는 일종의 탄식의 시이고 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영적으로 깊은 침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이 시편은 3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42:1-4이 탄식이고 이 탄식에 이어지는 후렴인 42:5까지가 1연이고, 다시 탄식이 42:6-10에 나오고 역시 42:11의 후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2연입니다. 이것은 43장에서도 동일한데, 43:1-4이 탄식이고 43:5이 후렴구로 3연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43장에서는 살짝 분위기가 전환되는데, 43편의 탄식은 보다 적극적인 간구이고, 43:5의 후렴구는 42:5이나 42:11 보다 확신을 더 표명하는 선언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시편과 관련하여 읽은 설교 중에서 수 십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는 한 편의 명설교가 있습니다. 로이드존스의 『영적 침체: 그 원인과 처방』이라는 책에 수록된 설교입니다. 로이드존스는 그 설교에서 영적 침체의 원인을 몇 가지로 다루면서, 이 침체에서 벗어나는 시인의 방도를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편에 3번 반복되는 후렴구에 나오는 ‘내 영혼아’라고 부르면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살펴보면서 이 부분도 생각해볼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
지금 시인은 하나님 부재의 경험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재하시다는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고 어디서나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목마르다고 말합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런 말을 썼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만들어두신 빈 공간이 있다. 그 빈 공간은 피조 세계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려지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채우실 수 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하지만, 이 말에는 사실 동의 이상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이 말을 절감하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누구나 이 고백을 이해할 수 있고 이 고백의 타당성에 지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 갈망, 이 갈급함을 가지고 시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가는 다른 문제가 아닙니까?
파스칼의 말대로, 모든 사람에게는 갈망이라는 빈 자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갈망이 무엇에 대한 갈망이며, 그 갈망을 무엇으로 채우려고 하는가 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이 빈 자리, 이 갈망을 엉뚱한 것들로 채우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를 원하고, 허무를 채워줄 수 있는 쾌락의 도구들—술, 섹스, 마약, 게임 등에 대한 중독--을 찾습니다. 또는 편안함이나 영예나 물질, 성공으로 이 자리를 메꾸어보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을 수련하거나 종교를 찾음으로써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로 가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우상으로 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그 자리에는 결코 자기 부인이 자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소위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데 함정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 생활은 참된 거룩한 변화를 낳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이 생각하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여러분이 욕망하고 갈망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 피조 세계에서 우리 안에 있는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 자리는 오직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만 채워주실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압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문제가 많을지라도,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압니다. 그는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께 목말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갈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비유컨대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으며 헐떡이는 사슴처럼, 자기가 하나님을 찾기에 헐떡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스펄전은 이 구절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기진맥진한 가련한 암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혹은 쫓기는 수사슴이 피 흐르는 옆구리를 씻기 위해 사냥개들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강을 찾듯이, 핍박받아 지친 내 영혼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그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고 영예를 탐내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급박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였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단지 멋진 사치품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목마른 수사슴에게 있어서의 물과 같이 절대적인 필수품으로 여겼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이 갈급함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갈급함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맛보아 안 적이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부재 보다 더 불행하고 비참한 상황은 없습니다. 성도에게 이것은 어떤 다른 삶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서 불행하고 비참한 모든 것을 넘어서는 비참함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상황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이 경험을 아십니까?


4. 공적 예배에 대한 갈망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시인의 갈급함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을 읽어보면, 우리는 시인이 구체적으로 원하고 바랬던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의 갈급함의 실체는 예배, 공적 예배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2절에서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말하는데, 그의 갈망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지만, 이것을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는 말로 부연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뵈올까’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구약 성경에서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뵙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출애굽기 23:17을 보지요.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출 23:17).” 여기 ‘보일지니라’는 말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에 모든 남자는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한 구절, 출애굽기 34:24을 볼까요?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출 34:24).”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인이 구하는 갈망의 실체는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즉 공적 예배입니다. 42:4절에서도 이 증거를 발견합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시인은 언제를 회상합니까?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던 일을 회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시인의 상황에 대하여 최소한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당장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강제적 상황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대적이 되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고 조롱하는 상황입니다(시 42:3). 그래서 시인은 눈물이 주야로 자기 음식이 되었다고 탄식하며 말합니다. 시인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또 한 구절은 42:6입니다. 시인이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헤르몬은 시리아와 국경을 마주하던 이스라엘 최북단에 있는 산입니다. 원문에는 ‘헤르몬 산(들)’이라고 복수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장엄 복수라고 하는 문법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복수로 표현함으로써 그 산의 위대함, 거대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살 산은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데, ‘미살’이 작은 언덕을 뜻하는 단어이므로, 아마 헤르몬 산 주변의 작은 구릉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지금 돌아갈 수 없는 환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외적인 압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니이까”라고 표현합니다(시 42:9b). 대적은 시인을 비방하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계속 조롱하는데 이것은 비수가 되어 시인의 골수를 찌릅니다(시 42:10).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기쁜 추억을 소환하는 것은 시인에게는 괴로움을 더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시 42:4). 시인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을 모르거나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사모하는 것은 공적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말입니다. 시인의 상황은 주변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운 상황인 듯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그는 공산 루마니아에서 14년간 투옥되어 온갖 고난을 겪은 유태계 그리스도인 목사입니다. 저는 그가 독방에서 보냈던 경험을 어느 책에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독방에서 그는 믿음의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그 독방에도 계시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매일 찾아오는 의심과 싸우면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 간절히 원하고 바랬던 것은 공적 예배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자유로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영광과 은혜의 경험 말입니다. 시편 본문에서 보는 바, 공적 예배에 대한 갈망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와 닿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의아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맛을 본 적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맛을 보았을지라도 너무나 미미하게만 맛본 것 때문은 아닐까요? 시인은 이 일로 얼마나 낙망하고 있었던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이것이 바로 이 시편 전체(42-43)에서 반복되는 후렴구입니다.
이 후렴구에서 시인은 낙심하는 자기 자신을 독려합니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시인이 낙심의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자기 영혼을 향하여 믿음의 싸움을 싸울 것을 요구하며 정함이 없는 어떤 것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확실하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우실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며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될 날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환난을 시편 42:7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시 42:7).” 이 표현은 자기가 겪고 있는 모든 환난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의 폭포 소리’ 그리고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라는 표현은 이 환난이 주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할 때 고백했던 내용도 거의 비슷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


5. 낙심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 환난이 하나님의 허락으로 일어나는 것이 맞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끊임 없이 묻습니다. 그 질문이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질문입니다. 시편 42:9에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시 42:9).” 지금 시인이 친히 겪고 있는 환난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질문입니다. 또 시편 43:2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2).” 여기서 묻는 ‘어찌하여’라는 질문들은 환난의 때에 믿음을 포기하여 마지막으로 던지는 말들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경험하는 긴장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 절정이 세 차례 반복되는 후렴구입니다. 시편 42:5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자신의 낙심과 불안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시인은 자기 영혼을 향해 설교합니다.“내 영혼아, 너 왜 이렇게 낙심하고 불안하여 하는거야?”라고 거의 꾸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정함이 없는 이런 저런 것, 또는 이런 저런 사람에게 목 매지 말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자기 영혼을 향해서 설교하는 것의 가치를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놀랍게 보여준 바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낙심의 자리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신자가 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6. 낙심스런 환경에 대한 성경의 통찰
말씀을 맺기 전에, 한 가지 이 시편을 통해서 얻게 되는 중요한 통찰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시편주석에 쓴 데렉 키드너(Derek Kidner)의 말을 인용합니다. “자기독백은 후렴에 3번 반복되는데, 신자의 두 성질 사이의 대화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확신을 가졌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변덕스러운 존재인 두 성질 말이다. 시인은 영원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시간 속에서는 그 마음과 육신이 무시할 수 없는 압박 아래 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 후렴구는 우리 존재의 두 성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이 (현실의) 고통이 피할 수 있다거나 반대로 견딜 수 없다는 암시를 주지 않는다.”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 고통이 피할 수 있다거나 반대로 견딜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 않는다.” 신자는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직면해야 합니까? 신자가 낙심할 때 그는 이 낙심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믿음만 있다면 이 정도 고통 쯤이야 얼마든지 피할 수 있어!”하는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까? 또는 그 반대로, “아무리 믿음이 훌륭해도 이 고통에서 내가 벗어날 길은 없고 나는 견딜 수도 없을거야!”라고 단정하지는 않습니까? 본문은 우리를 이런 양 극단의 태도로부터 지켜줍니다. 당장 고통스러운 환경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견딜 수 없는, 신자의 신앙을 침몰시켜 버리는 고통스러운 환경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시인의 고백대로, ‘주의 폭포 소리’요,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환난 속에서 믿음이 있다는 것, 또는 믿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고통 속에 처하게 하는 환경과 관련하여 어떤 차이를 만들어냅니까? 믿음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그 환경으로 하여금 우리와 우리의 믿음을 침몰시킬 수 없게 만들며, 언제 사라질지 알 수도 없는 그 환난을 능히 견디게 하고, 그 속에서 우리 영혼으로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낙심 가운데 있는 자기 영혼을 향하여 설교하는 시인을 통해서, 낙심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영적인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낙심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런 은혜를 이 시인과 함께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