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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로역정 (34) - 천로역정을 마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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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로역정 (34) - 천로역정을 마칠 때

빌립보서 1:20-26, 갈라디아서 2:20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19-08-07

말씀내용
우리는 33회에 걸쳐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 책은 우화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도의 신앙 여정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또한 성경적인 설명들로 가득한지를 여러분은 충분히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은 다 마쳤지만, 한 번 쯤은 이 책 전체를 돌아보며 우리의 천로역정을 끝내게 될 날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1부에서 크리스천과 소망이 천로역적을 마치는 장면을 보았고 2부에서는 크리스티아나와 더 많은 순례자들이 그들의 천로역정을 마치는 마지막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의 임종을 지켜보셨는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첫 텀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날 아침에 아버님이 임종하셨기 때문에 그 임종을 지킬 수 없었고, 심지어 광주에 와서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있었음에도 그 임종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불효자 중의 불효자이지요.
우리가 부모님의 임종이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분의 임종을 마주할 기회가 있겠습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임종을 준비하면서 마지막 숨이 멎는 순간까지 임종을 지켰던 한 권사님을 기억합니다. 평생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오셨던 노(老)권사님의 임종을 두 분의 따님과 함께 그분이 사랑했던 주님의 말씀을 읽어드리며 그분이 애창했던 찬송을 불러드리며 함께 했습니다. 마지막 큰 숨을 한 번 내어쉬고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 말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도 예외 없이 그 순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누군가는 우리의 임종의 순간에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오면서 남긴 흔적과 자취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임종을 맞이할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임종은 영광스러울 수 있고 어떤 임종은 비참하고 씁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론 영광스러운 임종, 우리의 천로역정의 마지막이 영광스럽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의 천로역정을 어떻게 걸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런 주제와 관련하여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이런 생각들은 자체로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될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은 생애 마지막 예배가 어떠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예배가 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이 지상에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만남이 된다면 어떻습니까? 오늘 내 아내와 만나는 만남이 마지막이라면, 오늘 내 딸과 혹은 내 어머니와 만나는 만남이 마지막이라면? 지금 제가 하는 이 설교가 제 마지막 설교가 된다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이런 생각들은 그 자체가 우리를 겸비하고 진지하게 하고 우리 신앙을 진작시키는 요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생각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로역정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여정을 전제한 삶이며, 목적지를 향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의 여정 속에서 기가 막히게 좋은 장소를 만났을 때, “아, 여기가 천국이지. 나는 그냥 여기서 머물러 살다가 죽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우리의 목적지인 천성을 향하여 걷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즉,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인생이란 사실을 놓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의 시간을 허송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준비하지 않은 시간에, 죽음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그 시간을 즐거이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존 번연의 불후의 명작인 『천로역정』은 이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빌립보서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길 원합니다. 우리가 천로역정을 마칠 때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 제일 먼저 드십니까? 두려움이 앞섭니까, 아니면 기대가 되십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자였던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의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생각하든지 하지 않든지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 바울 사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죽음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한 듯 보입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천천히 혹은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올 때에 우리가 미소로서 그것을 마주 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문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세 번 나옵니다. ‘죽든지’(20), ‘죽는 것도’(21), ‘세상을 떠나서’(23)라는 단어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생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 자체로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고 심지어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에게도 죽음은 고통이요, 슬픔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수식하고 치장해주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는 순간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다면, 지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심이 증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에게는 어떻습니까?


바울 사도가 환영한 죽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바울 사도에게는 분명한 욕망, 욕심,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사실보다 이것이 중요했습니다. 그가 더욱 원하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일’이었습니다(23).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내가 살아야만 내 가치를 실현할 수 있고 뭔가를 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도 죽어도 그 삶과 죽음을 통해서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만드는 삶을 살고 싶어했으며,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죽음을 죽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는 한가하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감옥 안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풀려나지 않는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살게 될 것과 감옥에서 그의 인생을 정리해야만 할 두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삶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분명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것은 20절의 고백의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죽음도 유익함은 내게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 2:20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더 이상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사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 사실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죽음은 그를 더 나은 상황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23절).
하지만, 그는 ‘그래도, 많이 양보해서, 내가 혹시 살아야만 한다면’ 이라고 말합니다. 22절을 보지요.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 1:22).”
그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사는 게 좋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23절에서 자기의 선택을 밝힙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삶과 죽음, 두 사이에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그는 선언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편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비교급 부사와 비교급 형용사를 같이 사용한 ‘훨씬 더 좋으나’라는 표현은 바울 자신이 얼마나 죽음을 원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죽음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강렬하게 원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하지만 바울 사도는 아직 자신이 이 땅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24절에 말합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유익하다는 말은 죽음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강렬한 욕망에 비교할 때 단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5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바울 사도는 죽음을 그토록 원하지만 살 이유가 있다는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진보와 그들의 기쁨을 위해서 입니다. 26절에서 이것을 부연합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6).”
바울의 존재는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을 넘치게 할 것입니다. ‘자랑’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합니다. 영광스러운 기쁨을 의미하는 자랑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기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바울의 존재 때문에 말입니다.


죽음을 환영할 이유들
여기서 사도에게 적용되는 모든 진리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즉 성도들에게는 바울 사도와 동일하게 죽음을 환영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실상 죽음의 공포가 근본적으로 제거되었습니다. 비록 죽는 것 자체에 유쾌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다가오는 죽음을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표에 있는 약속으로 보아야 합니다. 죽을 때 신자의 몸은 거룩함에서 온전하게 되고 하늘의 예배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화를 얻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안에서 그 의미를 잃었습니다. 성도는 죄의 결과로서 저주의 성격을 지닌 죽음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구주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해야할 모든 이유는 제거되었고 오히려 죽음을 환영하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 이후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도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몸은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고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도 않고 자지도 않음) 불멸이므로 이를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이 때에 완전히 거룩해지며 최상의 하늘 속으로 영접된다. 이 곳에서 그들은 빛과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몸이 온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32장 1항)
죽은 후 부활 때까지 무의식의 수면상태로 들어간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입니다(눅 16:22; 23:43; 빌 1:23; 고후 5:8; 계 6:9-11; 14:13). 성도는 죽을 때 의식을 가지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몸과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와 같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보다 더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때 몸이 부활하여 영화로운 육체를 입게 될 때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최상의 상태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최고의 상태입니다(고후 5:4~5).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의 심판을 통하여 완성된 천국을,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어 영벌의 지옥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요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사실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죽음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또한 중요합니다. 천국은 무한히 다함이 없으신 하나님 안에서의 점증하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천국은 하나님 안에서 점점 더 큰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끝없이 점점 더 발견해가는 곳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주심이 너무나 완전하게 주어진 나머지 더 이상 줄 기쁨이 없다고 하실 수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며, 우리 자신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천국에서도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성삼위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천국은 결코 정적인 곳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고 기뻐하기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절하는 그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십니다. 지옥은 무한히 영광스러운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거룩한 진노로 당신의 영광의 가치를 입증하시는 곳입니다. 지옥은 말할 수 없을만큼 현실적이고 의식이 있으며 무섭고 영원한 체험입니다. 천국에서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이제 충분히 만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는 둘 다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5:41, 46; 살후 1:8~9). 근자에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지옥의 존재가 영원하지 않으며 결국 한 순간에 불신자들의 영혼을 멸하시고 지옥도 없애실 것이라는 영혼멸절설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도 이것을 주장한 바 있지만,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다함이 없는 기쁨으로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 천성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믿음은 우리의 천로역정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의 말입니다. “여러분은 천국문에서 천사가 말하기를, 네가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존재인지 내게 입증하라고 도전할 때,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이 우리를 천국문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자격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죽음
그렇다면 성도의 심령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깃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죽음의 강 앞에서 순간 두려워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듯이, 성도의 죽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200여년 전, 36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숨을 거둔 영국의 리차드 로버츠(Richard Robarts) 목사는 임종 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기침은 무서웠고 내 가슴과 옆구리가 너무 고통스러웠다……수일 후 찬란한 영원 가운데서 그와 함께 있을 것을 믿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내 아내와 친지들을 위해서는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랬다.” 임종을 지켰던 사람들의 진술입니다. “그날 하루종일 그는 하늘의 기쁨의 환상을 체험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찼고 찬양과 안위와 승리의 말을 하였다. “오, 난 나의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난 영원히 그를 소유할 것이다. 황금길이 깔린 천성, 새 예루살렘,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죽음입니까? 이런 죽음은 특별한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준비하라.
청교도들은 인생을 죽음으로 들어가는 예비학교나 탈의실로 여겼습니다. 이 땅의 삶이 모든 부를 다 준다고 하여도 결국 천국을 준비하는 예비학교이며 옷을 갈아입는 방에 불과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사는 것을 배우는 첫 단계라고 가르쳤습니다.
시편 기자는 73편에서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리합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4–26).”
우리는 천성문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하늘과 이 땅을 비교하며 그곳이 훨씬 더 좋은 곳임을 확인하며 살아야 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잘 알려진 크리스천 뮤지션 마이클 카드(Michael Card)는 『동행』에서 자신의 멘토인 신학자 윌리엄 레인(William Lane)이 임종 전 자신에게 한 말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난 자네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죽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네.”
우리는 다 윌리엄 레인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가 천로역정을 함께 걷지만 누군가는 먼저 천성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누가 먼저 들어갈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죽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끝까지 숨이 붙어 있어 사는 동안, 바울 사도가 그랬듯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가, 그리고 여러분의 존재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유익을 여전히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을 맞기 위해, 영광스러운 천로역정의 마무리를 위해,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바로 성도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
저는 여러분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죽음이 되도록 돕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 중 먼저 천성문에 들어가는 지체의 장례식을 치룰 것입니다. 그 장례식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으로 그 문에 들어간 분을 기억하고 떠나보내는 영광스러운 장례식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부귀영화에 속아,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 뿐이요,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대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 자신을 가장 즐거워하십시오. 이 세상이 주는 것들로 만족을 느끼는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모시고 산다는 사실과 그 분과 사귀어 사는 삶 속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십시오. 이것이 믿음으로 천로역정을 걷는 삶입니다. 이곳은 여러분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반응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지금 죽어서 내 영혼이 사랑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여러분의 영혼을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죄인일 뿐이며, 죽음을 통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믿으며 주님의 자비로우심 앞에 영혼을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분들은,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즐거워하는 삶을 살다가 큰 기쁨으로 죽음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천로역정을 마칠 그 때를 기억하고 사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께서만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