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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3). 주를 갈망하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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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3). 주를 갈망하는 영혼

시편 63:1-11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5-20

말씀내용
시편 63편은 초대교회가 주일 아침예배를 드릴 때 가장 먼저 부르는 시편 찬송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왜 그들은 많은 시편 찬송 중에서 63편을 첫 찬송으로 불렀던 것일까요? 4세기의 교부였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서 명설교가이기도 했던 요한 크리소스톰도 이 시편을 특별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전체의 정수가 이 시편에 압축되어 있다.”(Quoted in J. J. Stewart Perowne, The Book of Psalms, 2 vols. (1878; repr., Grand Rapids: Zondervan, 1976), 1:486., 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에서 재인용).
존 칼빈의 후임자였던 종교개혁자 데오도르 베자(Thoeodore Beza)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이 시편을 찬송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누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편이 이토록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편은 마땅히 사랑을 받을 만하고,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시편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63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쓰여진 정황
63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이거나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는 부분을 보면, 이것은 왕이었던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났던 상황임을 추정하게 합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왕위와 모든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궁을 떠난 다윗 왕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이 시편을 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편의 내용에, 아들의 배신으로 인한 불평과 원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잃어버린 왕위와 명예, 다시 궁으로 돌아가는 일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63편은 분명히 기도이지만, 간구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소원이나 기쁨, 찬양과 교제의 내용은 있지만 간구는 없습니다. 도리어 다윗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영원을 위해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2. 고난과 갈망의 법칙(1)
1절은 다윗이 처한 물리적 상황과 내면의 상황을 놀랍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편 63:1).”
다윗이 처한 물리적 환경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광야입니다. 다윗이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윗은 간절히 주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자기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있는지, 갈망하고 앙모하는지를 표현하려고 자기가 현재 물리적으로 처해있는 광야를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목이 말라서 거의 죽게 된 것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만큼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페로운(J.J.Stewart Perowne)은 ‘앙모한다’는 말은 실신할 정도로 너무나 사모하여 시력을 잃을 만큼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영혼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주를 앙모합니다. 육신과 영혼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언약으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가진 개인적이고 친밀한 고백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할 만큼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선하심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인간의 가장 큰 갈망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이런 큰 갈망을 우리가 거의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관심과 갈망이 쇠퇴하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역경과 시련을 보내십니다. 우리가 이런 갈망을 놓치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개는 분주해서 그렇거나 삶이 적당히 만족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멈춰 서게 하시거나 또는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계속 세상의 우선순위들에 의해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밀려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심하게 쇠약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와 함께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모든 것이 멈추어 서 버렸고, 우리는 전과 같은 일상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이 바라는 바, 또는 여러분이 취하는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하나님을 갈망할 수도 있고, 그저 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외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둘은 매우 큰 차이를 가집니다.
로이드존스의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역경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생명의말씀사, 1991), p.128). 역경이나 고난이 언제나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다가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역경 속에서 마음에 쓴 뿌리를 내리게 되고 불평과 원망으로 강퍅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역경과 고난은 우리 믿음의 진위를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심으로써 그것을 깨우쳐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 주일예배를 정상적으로 모이지 못하고 3개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겪어본 적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당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멈추어 섬의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공예배—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가 그것의 가치를 얼마나 잊고 살아왔는지, 단지 모임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은 영적 결속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여기서 진짜 우리 속에 가장 깊이 감추어져 있던 갈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윗이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에서 쫓겨나 유대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는 잃어버린 왕위가 아니라,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자신 안의 깊은 갈망,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지식을 향한 갈망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아래 구절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9).”
시편 63편은 우리가 한가하게 종교 놀음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은 기독교의 진수, 기독교의 우선순위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이런 점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로 하여금 이 시편을 사랑하게 만든 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르고 황폐한 광야는 종종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일깨우고 우리로 본래의 우선순위로 돌아가게 합니다.


3. 과거의 은혜(2)를 기억하며 만족하는 영혼(3-5)
사람이 이런 갈망을 재차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미 과거에 그런 은혜를 경험한 바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편 63:2).”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가진 현재의 갈망을 과거에 자신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목도하였던 은혜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깊어지면서, 다윗은 과거에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서 큰 은혜를 누렸던 때를 생각합니다. 그때 그의 영혼을 만족할 수 있었고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했었습니다. 사실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했던 공예배의 은혜를 추억하는 말입니다.
이런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 갈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과거에 체험한 큰 은혜를 회상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다윗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다윗은 자기 생명이 최고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가장 귀하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인자하심은 결코 잃어버려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고백한 말의 의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세상의 애착하는 것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수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고 살지 않습니까? 정작 생명 보다 귀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쏟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입술만의 고백에 머물 수 없는 말입니다.
다윗은 현재의 갈망을 직면하면서 과거의 은혜와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다윗의 마음은 더 나아갑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편 63:4).”
단지 입술만의 찬송이 아니라, 평생의 찬송으로, 그리고 손을 드는 몸짓이 동반되는 찬송으로 확장됩니다.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말입니다. 다윗의 갈망은 어느새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은 그 고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편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은 가장 기름진 음식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기름진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여기지만, 성경 시대에 이것은 가장 좋은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의 이 말은 마치 영혼이 축제를 즐기면서 가장 좋은 것들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영혼의 만족감과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4. 결심(6-8)
다윗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6절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갈망이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시편 63:6).”
다윗이 ‘침상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밤에’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밤에 ‘주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기억한다’는 말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말합니다. ‘읊조린다’는 말은 ‘묵상하다, 표현하다’라는 뜻인데, 자기가 기억한 것을 생각하고 조용히 읊조리고 이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제 그것을 합니까? 밤과 새벽에 한다고 말합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갈망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에서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라고 했었지요? 이 말이 KJV에서는 ‘일찍(early) 주를 찾되’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찾는다’는 말과 ‘일찍’이 같은 어근을 가진 히브리어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찾는다는 것은 6절에서 ‘새벽에’ 주의 말씀을 읊조린다고 다시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깊어진 영혼은 새벽, 하루의 첫 시간에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7절입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편 63:7).”
주님이 도움이 되심은 그 인자하심 때문에 얻게 되는 혜택이고 복락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 때문에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른다고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날개를 가지셨을 리 없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룹이나 스랍들이 가진 날개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넓고도 안전한 품을 상징합니다.
이제 다윗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 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8절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편 63:8).”
사실 이것은 결심이라기 보다, 다윗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라는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의미입니다. ‘가까이 따르니’는 창세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할 때 ‘합하여’라는 말과 같습니다(창 2:24).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에게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부 보다 가까운 관계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 이 말은 룻기 1:14에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를 붙잡고 유대 땅으로 돌아올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기 1:14).” ‘붙좇았더라’가 ‘가까이 따르니’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룻이 얼마나 신실하게 시어머니 나오미를 가까이서 섬겼는지를 압니다. 다윗이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주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섬기고 사랑하고 충성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때 자기를 붙들어주는 것은 주님의 오른손인 것을 다윗은 압니다.


5. 원수들의 운명(9-11)
9-11절에서는 분위기가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영혼의 갈망이 채워진 다윗은 확신 중에 자기 원수들이 멸망하게 될 운명을 선언하면서 기도를 마치게 됩니다. 9-10절입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시편 63:9–10).”
일반적으로 자신이 억울한 일이나 곤란을 겪게 될 때에는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고정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상황에서 자기가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맛보게 되자 이제 비로소 아주 여유롭게 원수들의 멸망할 운명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발견 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 모든 광야 같은 경험 속에서 그 갈망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옮겨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성도들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유롭고 자신감 있게 악인들의 멸망할 운명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11절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편 63:11).”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부릅니다. 그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맹세한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한 자입니다. 누가 그런 자입니까? 믿고 고백함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세례는 일종의 충성 서약입니다. 그리스도께만 충성하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찬양한다는 뜻인데 할렐루야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설령, 다윗처럼 아들의 반역으로 비참한 현실을 겪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반면,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힐”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3:19).”


6. 교훈과 적용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깊은 갈망이 있다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지친 심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우리 영혼의 갈망은 좀체 만족스럽게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고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강제로 멈춰 서게 하십니다. 인생의 광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가십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갈망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호세아 2:14).”
‘거친 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우선순위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마르고 황폐한 광야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그 갈망을 발견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라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그 갈망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힘든 상황만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광야 효과를 경험했습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마음이 강퍅해지기만 합니까?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다윗과 같은 갈망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버지의 사랑을 더 잘 알고 싶은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더 가까이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서 성령님을 더 강력하게 체험하기를 사모하고 앙모하십니까?
이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는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대로, 그 영혼이 만족하고 배부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새 그 갈망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부르는 찬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 보다 낫다고 고백하면서, 더욱 주를 가까이 따를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사랑했던 시편 63편에 기록된 이 모든 복된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영혼의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일에, 우리는 거의 반년 만에 주님의 상에서 먹게 될 것입니다. 리처드 필립스(Richard Phillips)는 본문에서 보는 다윗의 갈망과 성찬식에 임하는 자신의 기도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기도입니다. “주님, 이 잔과 잔이 상징하는 것으로 저는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얻고 믿음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면, 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얻습니다. 제게 은혜를 주셔서 주님을 붙잡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제 삶을 신실하게 바칩니다.” (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 217).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주님 한 분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여기는 마음, 이것이 다윗의 갈망의 정체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갈망을 보게 하시고,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우리 갈망을 채워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