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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2).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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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2).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시편 62:1-12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5-06

말씀내용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왜 성경은 하나님을 신뢰함과 관련하여 잠잠하라는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본문 1절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5절에서도 비슷한 반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신뢰할 때, 잠잠하라고 말씀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뒤에 홍해 앞에 이르렀는데, 뒤에서는 변심한 바로의 군대가 거의 따라붙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두려움에 휩싸여 울부짖는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13–14).” ‘가만히 서서’, 그리고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원문에는 ‘가만히 서서’는 그냥 ‘서서’라는 말이지만, 뒤에 ‘가만히 있을지니라’는 말은 침묵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지금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을 가만히 서서 지켜 보아라”라는 뜻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스가랴 2:13).” 선지자는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잠잠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하고 떠들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존재 앞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하는 말씀은 시편 46:10입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편 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라는 표현은, ‘힘을 빼라, 긴장을 풀라, 기운을 빼고 뭘 하지 말라’는 정도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네가 나를 위해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으로 존귀를 얻는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다”라는 선포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1절과 5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같은데, 잠잠하기가 어렵습니다. 여전히 불평하고 두려움을 호소하고 이런 저런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곤 합니다. 스트레스와 압박이 증가하고 있다면, 더더욱 잠잠하기란 어렵습니다. 본문은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세 가지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
먼저,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만’이라는 단어인데 모두 6번 사용되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만’, 2절에서 ‘오직 그만이’, 4절에서 ‘떨어뜨리기만’, 5절에서 ‘하나님만’, 6절에서 ‘오직 그만이’, 그리고 끝으로 9절에서 ‘입김이며’(오직 입김일 뿐이며) 입니다. 이 ‘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크(אַךְ) 라는 부사의 어감을 살리고 그 단어를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번역하기는 어느 언어로 번역을 하더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는 ‘오직, 분명히, 확실히, 참으로’ 라는 뜻을 가지는 강조 부사인데, 이 단어의 반복은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의 신앙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단어는 특히 4절과 9절을 제외하면, 4번 모두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오직 하나님께 대하여 나의 영혼은 침묵이다”가 됩니다. 내 영혼과 침묵이 동격으로 묘사되고, 침묵은 내 영혼의 존재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항복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승리한 군주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패장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한 군주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자한 분이십니다. 11-12절입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편 62:11–12).”
그래서 다윗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1b). 다윗이 기대하는 다른 대상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을 설명해줍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이라는 다윗의 표현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2절에서 그는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오직 그만이’라는 표현은 ‘확실히 그분만이’라는 말입니다. 반석은 자기 삶을 견고한 바위에 세운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에게 힘과 확고함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결과로서의 구원입니다. 요새는 망대와 같은 말로,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산성이고, 안식을 주는 확실한 피난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자기에게 그런 보호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 고백이, 많은 반석과 구원과 요새가 있지만, 하나님도 그런 역할을 하신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반석, 구원, 요새는 오직 하나님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9-10절에서 우리가 쉽게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대상들을 언급하면서 그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가르치고 경고합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편 62:9–10).”
9절에서 ‘사람’과 ‘인생’은 원어로는 각각 ‘아담의 아들’과 ‘남자의 아들’인데, ‘신분이 낮은 사람’과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은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라고 번역했고, [우리말성경]은 “비천한 사람도 헛것에 불과하고 귀족도 역시 별것 아니다. 저울에 달면 둘을 합쳐도 한낱 한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인생은 짧고 허무해서 잘나고 못나고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입김이며’라는 말도 ‘오직 입김일 뿐이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입김’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서는 ‘헛되다’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72회 사용되었는데, 38회가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공허하고 무가치하고 하찮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단해 보이고 권력과 위세가 등등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그것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한낮 헛된 입김에 불과한 사람이 자랑과 자만에 찬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허언일 뿐입니다. 이것이 “인생도 속임수이니”라는 말의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화려함 뒤에 숨어서 살아갑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야말로 거짓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면 다 입김 보다 가벼운 존재일 뿐입니다. ‘저울에 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이사야 40:15).” 모든 나라가 다 하나님의 저울 위에서는 먼저 같이 가벼운 것이라면, 우리가 인간을 두려워하거나 인간에게 소망을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실하고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그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을 두는 것을 위험합니다. 우리는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실망하게 될 뿐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도 잃어버리게 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경고합니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편 62:10).”
포악은 외적 압박을 포함하는 심한 압제를 가리킵니다. 소위 세상을 호령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돈이거나, 정치적 권력 혹은 학벌이나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또 ‘탈취한 것’은 불의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가리킵니다. 세상에는 법망을 피해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며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비도 긍휼도 사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 보다 돈이 더 귀하고, 이웃이 고통을 겪고 죽어나가도 나의 부(富)가 더해질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습니다. 이렇게 부를 모으는 일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것들도 다 헛된 것이고 입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Jesus + Nothing = Everything.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은 부, 건강, 성공, 마음의 평화, 더 나은 삶에 대한 약속,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본문을 시작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력 같은 헛된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2. 항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
두번째로 본문은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5-6절은 1-2절과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반복을 보여줍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62:5–6).”
여러분은 이 구절이 가지는 1-2절과의 차이를 발견하셨습니까? 1절이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5절은 명령법으로 쓰였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종종 흔들리기 쉽고, 어제의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 내가 믿음으로 반응했다면, 어제 내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면, 오늘도 나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페로운(J.J.Stewart Perowne)의 말대로, 신자의 영혼은 지속적인 확신에 머물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자기 영혼을 향해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반절에서는 1절의 ‘구원’이 ‘소망’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기에, 이것은 또한 소망으로도 표현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침묵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결코 좌절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잠잠히 당신만을 기다리는 자에게 보상하신다.” 이것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혼이 믿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6절은 2절과 거의 흡사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했는데, 6절에서는 ‘크게’라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기도가 깊어지면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확신도 커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원수들의 공격 때문에 조금 흔들렸고 흔들리고 있었음을 고백했지만, 지금은 정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깊어지는 기도 속에서 더 강한 확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도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응답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에게 응답을 더디 주셔서 우리로 오래 기도하게 하시고 많이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헛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과정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확신이 더 강하고 깊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여러분의 기도의 삶에서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다윗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다윗은 자기의 그 결심과 명령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7절의 고백입니다. 한낱 입김에 불과한 사람과 권력과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는 다윗은 자기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으며 자기 힘의 반석이시고 피난처이신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참된 안식과 평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모든 이성과 지식과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입니다.
이제 다윗은 자신의 모든 은혜로운 경험을 통해서, 8절부터는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설교입니다. 8절입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시시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시시로’라는 말은 ‘전적으로, 평생에, 모든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은 그저 한 때 내는 열심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은 시시로 항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토로하게 됩니다. 믿지 못하는 대상에게 마음 속의 모든 것을 쏟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또 아무 때나 마음을 토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마음을 토로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 중 하나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마음 속 깊은 것들이 흔들리는 고난의 상황에서 올라오게 되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께 그것을 토로하게 됩니다. 그가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도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
세번째로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도전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성을 보면, 1-2절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 나오고, 3-4절은 다윗을 공격하는 원수들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다시 5-8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이 나오고 9-10절에서는 사람이나 권력, 물질을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속성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11-12절에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내용인, 1-2절, 5-8절, 11-12절 사이에(3-4절과 9-10절)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받고 있는 공격,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압박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편안할 때, 이 시편을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데렉 키드너(Derek Kidner)의 말대로, 본문은 다윗의 스트레스가 올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쓴 시입니다. 3-4절입니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시편 62:3–4).”
여러 사람이 일제히 다윗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공격하기를’이라는 단어는 본래, ‘외치다, 고함치다’라는 의미인데, 아마 말로써 다윗을 공격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모든 말은 거짓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즐기는 악인들이었습니다. 더욱 거짓된 것은, 앞에서 입으로는 축복을 말하지만, 뒤에서 속으로는 저주를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다윗을 끌어내리려는 자들이었습니다.
3절에서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원문에서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먼저 이것은 다윗을 가리킬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윗이 많은 원수들의 공격을 받는 자신을 이렇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으로 볼 때, 이렇게까지 느꼈다고 여기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새번역, 현대인의성경, NIV, ESV 등이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반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는 다윗의 원수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수들이 아무리 다윗을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그렇게 무너지고 넘어질 존재들에 불과하다는 말이 됩니다. 개역개정과 공동번역, NASB, KJV, RSV 등이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번역 뿐 아니라, 주석학자들도 거의 비슷한 비율로 양분되는 상황이기에, 둘 중 어느 것이라고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점은, 다윗의 이 시편 고백이 한가한 데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의 고백이 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도전이 거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7절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구원이시라면, 누가 하나님을 이기고 나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내 영광이시라면, 누가 나를 고소하고 수치스럽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내 반석이신데, 어떤 폭풍이 내가 누리는 평정을 흔들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피난처이신데, 어떤 무기로 내게 이르러 나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7절의 고백은 이런 고백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의 말미에서 선언하듯이 하는 말이 바로 이런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1–35).”
도전이 없는 신앙은 아직 참된 신앙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도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정리하면,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는 본문에서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고, 항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며, 모든 도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두 가지 교훈을 적용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A. 경건한 어른의 설교
첫째는, 다윗이 자신의 은혜로운 영적 경험을 경험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권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한 어른의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운 영적 경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경험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리하고 소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개인적 경험은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 신앙 공동체에게로 흘러갑니다. 다윗이 “백성들아”라고 말하는 8절에서 12절까지가 그의 설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도전적 상황과 그 속에서 여러분이 경험하는 모든 은혜는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 소화한 뒤에, 그것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도록 겸손히 삶과 행동과 말로써 그것을 나누십시오. 경건한 어른의 설교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보니, 사람은 두려워할 대상도 아니고 소망을 둘 대상도 아니더라. 너희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신뢰하여라. 오직 하나님만을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만을 신뢰하여라. 어떤 도전이 있더라도 말이다.”라고 말입니다.

B. 신앙은 신앙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에 기인한다.
둘째로,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신앙하는 자의 열심에 달린 문제라기 보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달린 문제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문제를 오해하고 혼동합니다. 신앙은 믿음의 능력의 문제 이전에,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토대를 둡니다.
11-12절을 보지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편 62:11–12).”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셨다는 의미이거나, 하나님께서 두 개의 교훈을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나 다윗은 두 가지 교훈을 배웠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 두 가지 내용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과 인자함은 주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권능과 인자함이 주께 속했습니다. 진정한 힘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진짜 인자함은 친절하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따라 신실하고 변함없이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왜 다윗은 권능과 인자함, 두 가지를 언급하는 것일까요? 페로운(J.J.Stewart Perowne)은 말합니다. “인자함이 없는 권능은 잔인함이고, 권능이 없는 인자함은 약함에 불과하다. 권능은 인자함의 강력한 토대이고, 인자함은 권능의 아름다움이며 면류관이다.”
이미 앞에서 다윗이 고백한, 반석, 구원, 요새, 소망, 영광, 피난처라는 표현들이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전제한 고백들이라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신앙의 견고한 토대를 쌓아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선교사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이렇게 그의 일기에 적었습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보낸 시간 보다 값진 시간은 없었다.”
어떤 도전의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일평생 신뢰하고 살아가는 복된 인생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