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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0).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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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0).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시편 60:1-12, 사무엘상 17:47, 요한복음 15:5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4-08

말씀내용
1. 신자가 실패와 패배를 겪을 때
인생을 살면서 실패와 패배를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실패와 패배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것은 불순종이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렸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징계를 받게 되는 경우라면, 대개 그 죄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슬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즉각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시편 60편은 다윗이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드린 기도입니다. 아마도 이 패배는 범죄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은 패배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군대 가운데 어떤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은 패배였을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패배를 경험한 것처럼 말입니다(수 7). 물론 성경은 이 패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패배를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군대를 거절하셨다고, 버리셨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1a).”
여러분은 어떤 사건을 통해서나 혹은 어떤 계기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절하신다고 또는 버리셨다고 느낀 적이 있으십니까?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재난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이런 재난을 당하고서도 깨닫지 못하거나 여기에 무관심한 것이다.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고서 우리가 탄식하고 회개한다면 이 심판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끝나게 된다. 버림받은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탄식한다면 이 영혼은 진정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시편강해 5권, p.78)
실패와 패배를 경험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중요합니다. 시편 60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배우십시다.


2. 본문의 배경
시편 60편은 52편에서 시작된 바, 구원을 주제로 한 시편들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이들 시편들의 표제들은 모두 다윗의 생애의 어떤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런데 60편의 표제는 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표제는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배경인 사무엘하 8:1-14(병행본문 대상 18:1-13)도 승리의 상황과 일치하고 그 본문에는 패배의 기록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시편의 내용이 패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라는 점입니다. 표제와 내용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경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에게 오랜 세월 쫓기던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1-5). 이어서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삼하 5:6-16). 그 다음에 다윗이 한 일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일입니다(삼하 6:1-15). 이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는 열망을 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성전은 네 아들 솔로몬이 지을 것이며, 내가 너의 집에 왕위가 그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언약입니다(삼하 7). 이어지는 사무엘하 8장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삼하 8:6,14).
바로 사무엘하 8장이 바로 시편 60편의 배경입니다. 분명히 이 본문은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시편 60편이 승리의 배경에서 쓰여진 시라면, 도대체 1-4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 10절은 어떻게 읽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 왕국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확장되는 가운데, 다윗은 멀리 아람을 정복하기 위해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원정을 나가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주력 부대를 데리고 먼 원정을 나가자, 이스라엘 남방 인근의 에돔은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실제로 에돔의 공격은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남방에서의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요압에게 지시하고, 결국 요압의 군대는 사해 인근 염곡에서 에돔을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옛 전쟁의 역사를 읽을 때, 승자가 겪은 작은 패배들은 전체의 승리에 묻혀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의 분위기는 승리를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전투의 패배라 할지라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편 60편은 그 행간에 일어난 패배를 통해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여기에 두 가지 의아한 점이 남습니다 첫째는, 표제에서 요압이 쳐 죽인 12000명은, 사무엘하 8:13(대상 18:12)의 18000명의 숫자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필사자의 실수이거나 오랜 원정에서 치룬 전투들에서 어떤 전투를 포함시키는가에 따른 계산의 차이일 것입니다.
둘째는, 역대상 18:12에 의하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인 장수는 요압이 아니라 아비새입니다. 이것은 아비새가 요압의 동생으로서, 형 요압의 수하에 있던 장수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싸운 장수가 아비새였다고 할지라도 군사령관인 요압의 지시를 받아 싸웠다는 점에서 요압의 승리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본문의 구조를 잠깐 살핀 후에 본문을 직접 상고하겠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1-5절은 패배로 인한 탄식의 부르짖음을 기록하고 있고, 6-8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9-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확신하면서, 함께 하사 승리를 달라는 간구입니다.


3. 탄식의 부르짖음(1-5)
먼저 1-5절에 있는 탄식의 부르짖음을 보지요. 다윗은 1절에서 ‘버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거절하고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군대를 버리셨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런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종종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함께 사용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이라는 표현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은 연인이나 특별한 관계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별한 애정을 담은 이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최고의 강력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와 내 군대를 버리셨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이 확신을 접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신자들에게도 때때로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행하시는가, 나를 버리시는가를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에라도, 신자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는 자기를 버리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버림을 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말하는 근거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군대를 흩으셨고 분노하셨습니다. 분노하셨다는 것은 아마도 다윗이 자신의 군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돌아오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의 관심은 패배나 승리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패배와 승리 보다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 기도가 보여줍니다. 이 시편 전체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승리입니다.
2-3절은 다윗이 느끼는 패배의 참상과 패배의 결과를 표현합니다. 에돔과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다윗에게 지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전투가 컸기 때문이거나 패배의 손실이 컸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패배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 패배는 지진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패배는 내적으로는 포도주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이 흔들렸고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패배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중요합니다. 2-3절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지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어려움을 보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얻는 승리와 성취만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패배와 실패의 경험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쁜 일은 마귀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간구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시편 60:4).”
이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먼저는 개역개정역처럼 번역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패배의 전장에서 하나님이 깃발을 높이 올리시면, 군사들이 다시 그 깃발 아래 집결하여 싸울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깃발은 진리의 깃발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주의 군대는 나아가 싸우는 자들입니다. ‘진리를 위하여’라는 말은 상황이 힘들지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 이 깃발 아래 모이는 자들은 진리를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다르게도 번역됩니다. “활을 쏘는 자들에게서 피하여 도망치도록, 깃발을 세워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시오.”(새번역성경).
왜 이렇게 번역이 가능한가하면, 진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쉐트(קֹ֫שֶׁט)’가 활, 화살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달게 하셨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게양하다, 깃발 주위로 집결하다’는 뜻 외에도 ‘도망하다, 도피하다’는 뜻을 가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위하여’라고 번역이 가능하지만, 또한 ‘화살을 피하여, 화살로부터 도피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패배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깃발을 드시면, 주의 군대는 화살로부터 피하여 다시 깃발 아래로 집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간구를 정리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시편 60:5).”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말하는 다윗의 간구에는 자신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확신이 깔려있습니다. 이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사실 이렇게 과감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사랑을 받는 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나를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여 주세요”라고 그는 기도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사무엘하 7장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는 확신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패배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잘 묵상하는 것은 인생을 사는 동안 실패와 패배를 피하고 살 수 없는 성도들에게는 크나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응답(6-8)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것이 6-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라고 시작합니다(6a). 그 말씀은 이러합니다.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시편 60:6b–8).”
이것은 승리의 약속입니다. 세겜과 숙곳은 요단 강을 중심으로 서편과 동편에 있는 이스라엘의 영토이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말하자면, 요단 강 서편과 동편의 하나님의 소유된 기업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뛰놀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측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대로 땅을 나누어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길르앗과 므낫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땅입니다. 므낫세는 반은 요단 동편에, 반은 요단 서편에 나누어 기업을 받았습니다. 이도 세겜과 숙곳 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주신 기업, 요단 동편과 서편을 막론하고 모든 땅을 일컬은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남왕국의 대표이고 다윗의 지파이며 메시야가 약속된 지파입니다. 에브라임을 머리의 투구라 하심은 신적인 능력으로 북쪽의 공격을 방어하시겠다는 의미일테고, 유다를 규라고 하심은 당신의 왕권이 유다를 통해 이어질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온 땅의 주인이시므로(다윗이 아니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8절에서는 모압을 하나님의 목욕통에, 에돔을 신발을 던지는 대상으로, 블레셋을 이스라엘에 굴복한 존재로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모압, 에돔, 블레셋은 다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이었습니다. 목욕통은 발을 씻는 용기를 말하는데 모압은 발 씻는 용기를 들고 오는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에돔에는 신발을 던진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땅의 소유권을 옮길 때 소유자가 하는 행동일 수 있고, 또는 집에 돌아온 주인이 신발을 종에게 휙 던져 씻으라고 하는 행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종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종이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북방 원정을 멀리 떠난 틈을 노려 이스라엘의 남방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패배시킨 에돔은 가장 비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는 말씀은, 상당히 풍자적 조소가 깃들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이 자기를 정복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을 존경하면서 외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시편 60편 5-12절은 시편 108편 6-13절에서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시편 108편의 전반부(1-5절)는 이미 우리가 상고한 시편 57:7-11을 인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108편은 시편 57편의 후반부로 시작해서, 60편의 후반부로 마치는 것입니다. 시편의 편집자는 분명한 이유로, 이 두 시편으로부터 내용을 가져와 하나의 시편을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는 부분이 약간 상이합니다. 시편 108:9에는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외치는 것이지요.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5. 확신에 찬 간구(9-12)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을 들은 다윗은 확신에 찬 간구를 드림으로 이 시편을 마감합니다. 이제 다윗은 요압에게 지시하여 에돔을 치라고 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시편 60:9).”
에돔은 지형적으로 견고한 성(요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요새를 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군대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도록 배우지 않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다윗은 이미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알았습니다(삼상 17:47).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5b). 신자는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력, 자신의 능숙함, 자신의 경험을 믿고 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임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 재차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60:10).”
“이번에는 우리 군대와 함께 가시는 것이 맞지요?”라고 확인을 합니다. 자기는 사람의 구원을 의지하지도 믿지도 않음을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시편 60:11).”
마지막 간구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편 60:12).”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이것이야말로 신자가 자신이 맞닥뜨리는 모든 대적들, 원수들, 장벽들을 향해서 할 수 있는 담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6. 교훈과 적용
이제 시편 60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정리해봅시다.
여러분을 담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실력입니까? 실력은 학문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룬 성취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여러분을 담대하게 만드는 요소라면, 여러분은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에게 다윗이 경험한 것과 같은 작은 실패를 깊이 경험하게 해주시기를 저는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라고 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진리의 깃발을 세우실 때, 그 깃발 아래로 모여드는 자들입니다. 그 깃발은 복음이고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깃발을 높이 들어올리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기도하게 하시고 엎드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아니면 엎드리지 않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들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나톨리 샤란스키(Anatoly Sharansky 또는 Natan Sharansky, 1948~)라는 한 유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여러 직무의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본래 소비에트 시절, 그곳에서 태어난 유대계 러시아이었습니다. 그는 소련에서 인권운동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9년간이나 수용소에 투옥돼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기록한 [악을 두려워 말라, Fear Not Evil]에서, 고문과 고립 등으로 인간성을 없애려는 수용소의 체계 속에서 무엇이 자신을 지켜주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아내가 넣어준 히브리어 시편을 가지고 40일 동안 이것을 쓰고 읽는 일을 계속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날마다 나는 과거와 화해했고 나의 슬픔과 상실의 감정이 점점 달콤한 슬픔과 애정 어린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그가 감옥에서 수년 동안 겪은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심리적인 압박은 대단했지만, 그의 영혼은 망가지지 않았고, 시편의 말씀은 아나톨리의 마음 속에 악에 의해 부서지고 점령당한 영역들을 고치고 되돌려 놓곤 했던 것입니다.(Gerald Wilson, Psalms Volume 1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by Zondervan).
이와 같이, 우리도 인생에서 겪는 모든 실패와 패배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형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라고 소리치며 담대히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