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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9). 대적들이 내 생명을 찾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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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9). 대적들이 내 생명을 찾을 때

시편 59:1-17, 베드로전서 2:18-21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3-18

말씀내용
인생을 살면서 무고히 사람들의 오해를 받거나 적대감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일은 일반적으로도 일어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더 심하게 일어납니다. 아무 잘못이 없이 여러분이 가진 신앙 때문에 가정에서 믿지 않는 식구들과의 갈등을 빚게 되거나, 직장이나 사회 생활에서 괜한 적대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갈등이나 적대감의 상황을 모두 이런 영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받는 적대감이나 고난을 신앙의 핍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데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베드로전서 2:18–20).”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많은 불신자의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신앙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적대감을 받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처럼, 여러분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적대감의 대상이 된 적이 있습니까? 사실 이것은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필연적인 경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이런 자리에 몰린 주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본문의 배경(삼상 19:11-17)
시편은 51편의 유명한 참회시에 이어 52편부터는 다윗의 생애의 어떤 사건과 연관된 시편들이 죽 이어졌습니다. 그것이 59편과 60편으로 마치게 됩니다. 이 시편의 순서가 연대기적 순서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51편과 60편을 제외하면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의 사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구원해 달라, 건져 달라는 간구들입니다. 51편과 60편운 이 시편 목록의 괄호처럼 양쪽에서 그것을 묶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시편 59편이 어떤 상황에서 쓰여진 시인지를 보겠습니다. 표제는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 긴박한 상황을 벗어난 뒤에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이 상황은 사무엘상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부터 몇 절을 보지요.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사무엘상 19:11–17).”
다윗은 사울 왕이 악령에 시달리는 일 때문에 그럴 때마다 수금을 타서 그를 달래는 일로 발탁되어 사울 왕 옆에 머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과 대치하던 에베스담밈으로 가게 됩니다. 군복무를 하는 세 명의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주라는 심부름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았고, 이스라엘 온 군대가 감당하지 못하던 거인 골리앗을 혼자 물리치게 됩니다. 이후 다윗의 인기는 치솟게 되고 사울은 점점 질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기 앞에서 수금을 타던 다윗을 향해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이후 자기 딸 미갈과 결혼하여 사위가 된 다윗에게 다시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지만 또 실패합니다. 사울은 멈추지 않고 부하 군인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내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죽이게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미갈이 이 소식을 알게 되고 긴박하게 그 밤에 창으로 다윗을 탈출시키고, 이튿날 아침 다윗을 위하여 시간을 벌어줍니다. 우상에게 의복을 입히고 염소 털을 씌워 침상에 눕히고는 다윗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분노한 사울 왕이 침상 채 가져오라고 하자 결국 미갈의 거짓말이 탄로나고 미갈은 다윗의 협박 때문에 그리 했노라고 아버지 사울 왕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기 생명을 찾는 사울 왕과 군인들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다윗은 그 일을 생각하면서 이 시편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본문의 구조(5; 요 15:18,19)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쓰여진 시편이지만, 이스라엘 역사에 국가적 차원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시편이었습니다. 5절 하반절에는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원수 나라들을 벌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개인이나 교회에게 적용되는 적실성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요 15:18,19).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이 필요합니다.
59편은 크게 1-9절과 10-17절, 두 연으로 구분됩니다. 두 연은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는데, 먼저 첫번째 연을 보면 1-5절이 대적들로부터 구원해달라는 간구이고 6-8절은 대적들에 대한 묘사, 그리고 9절이 후렴입니다. 두번째 연도 구성이 같은데, 10-13절이 간구이고 14-15절은 대적들에 대한 묘사 그리고 16-17절이 후렴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3. 건지시고 구원하소서 (1-10; 요 15:25; 빌 3:2; 계 22:15; 시 2:4; 37:13)
1-2절은 긴박한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네 개의 동사가 총알처럼 빠르게 이어집니다. ‘건지소서, 높이 드소서, 건지소서, 구원하소서’입니다. 1-2절이 주는 어감은 긴박함입니다. 다윗은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원수’이고 ‘일어나 나를 치려는 자’이며 ‘악을 행하는 자’이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입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은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는 자들’이고, ‘강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여 다윗을 치려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것은 사무엘상 19장의 상황을 잘 묘사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건져 달라고 두 번 부르짖습니다. 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를 ‘높이 드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말은 원수들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망대에 자신을 올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다윗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특별히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3절 하반절과 4절을 보면, 다윗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시편 59:3b–4).”
다윗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 잘못도, 죄도, 허물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명을 찾는 대적들에게 자기가 행한 잘못이나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편 35:19와 69:4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듯이,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요 15;25).
한편, 다윗의 이런 결백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를 더욱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기도하게 할 것입니다. 다윗이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라고 구하는 담대함은 다윗의 무고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깨어 살펴 주소서’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그는 또 간구합니다.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시편 59:5).”
다윗은 여기서 자기 생명을 찾는 자들 뿐 아니라, 그 대상을 확장시킵니다. ‘모든 나라들’을 벌하시라고 간구합니다. 그 나라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나라들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벌하시고, 은혜를 베풀지 마시기를 구합니다.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드문 표현인데(‘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선지자들이 많이 사용한 표현이지만), 이미 군대이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를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성도들은 과연 특정인을 향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언제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다윗이 벌하시고 은혜를 베풀지 말아달라고 구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6-7절입니다. “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시편 59:6–7).”
이들을 개라고 묘사합니다. 저물어 저녁이 되면 그 자리로 돌아와 울며 두루 성으로 두루 다니는 자들입니다. 그 입으로는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습니다. 여기서 개라는 표현은 21세기의 문화로 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개를 애완용으로 기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개는 시체와 썩은 고기, 쓰레기를 먹는 들개, 집 없는 개들입니다. 밤만 되면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짐승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할례의 법을 주장한 유대인들을 개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립보서 3:2).”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의 목록을 제시할 때, 개가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15).”
이런 개념으로 개를 이해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 입으로 악을 토하고 입술에서는 칼이 나온다는 말은 그들의 말이 더럽고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또 말합니다. “누가 들으리요?” 자신들이 말로 사람을 죽이는 모든 말들을 하나님이 들으실 수 없다는 것이고, 그 누가 듣는다고 할지라도 어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자신들을 멈출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들은 수동적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그저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적극적이며 능동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냥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을 벌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고만장한 자들을 향하여 비웃으시며 그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실 것입니다(8).
이 고백에는 다윗의 확신이 담겨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비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악행이나 위협이 성도들에게는 실질적으로 큰 위협일 수 있고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현실적으로 아는 것은, 그들의 그 모든 악행은 하나님 앞에서는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편 2:4입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4).” 그리고 시편 37:13도 같은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시편 37:13).”
성도가 자신에게 오는 위협과 두려움, 그 고통이 클지라도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기도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 상황을 풀어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하십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의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외적 구원은 기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고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평강을 주시는 일은 먼저 일어난다. 이렇게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고 기다림으로 나아가며 슬픔과 참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와 승리와 찬송으로 마친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두려움의 자리에서, 우리의 생명을 찾는 원수들이 많은 형편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제 9절은 첫번째 연의 결론이고 이 노래 전체의 후렴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편 59:9).”
다윗이 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요새라는 말은 높은 산성, 적들의 공격이 미칠 수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계속해서 이 못된 악행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생명을 계속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요새이신 하나님께 숨겨지면, 원수들의 어떤 공격도 닿지 못할 것을 압니다. 그리고 9절 하반절은 좀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여기서 ‘그의 힘’은 8절에서 부른 ‘여호와여’와 관계가 있을텐데, 문자적으로는, “그(여호와)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당신)를 바라리이다”가 됩니다.
사실, 59편은 엘로힘 시편으로 분류되는 시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라는 성호를 3번이나 사용합니다(3,5,8). 다윗이, 언약에 기대어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그것을 이루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9절에서 ‘그의 힘으로’는 ‘여호와의 힘으로’라고 읽게 되면, “여호와의 능력이 당신(주님, 하나님)께 있으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 의미는, “열방에 흩어진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그 주님을 바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 보겠습니다”하는 말입니다. 이 바람은 기도 과정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기도를 마쳤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두려움에서 찬송으로 (11-17; 삼상 17:46)
이제 두번째 연을 살펴봅니다. 역시 처음에는 간구가 나옵니다. 10-13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시편 59:10–13).”
다윗은 자기가 무엇을 보게 될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신의 구원, 건짐 받음이고 둘째는 원수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같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자기가 구원받는 근거를 자기의 허물 없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헤세드 때문입니다. ‘나를 영접하시며’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앞서 가시며’라는 뜻입니다. ‘영접하다’는 ‘미리 행동하다’ 또는 ‘앞으로 가다, 앞에 나타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앞서 가신다는 것은, 나를 구원하고 건지시려고 그렇게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인자하심으로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뒤따라가면서 원수들이 보응받는 것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원수들의 보응과 관련해서 다윗은 특이한 간구를 합니다.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구합니까?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산 교훈이 되기를 그는 바랍니다.
12절에서 다윗은 원수들을 다 죽이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다 사로잡혀 가기를 구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소멸될 것입니다. 13절에서 다윗은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13절 하반절에 다윗이 구하는 정말 높은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다윗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원수들의 멸망이나 자기가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진정 원하고 바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생각이고 목표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붙어 싸울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사무엘상 17:46).”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14-15절에서 다시 반복하여 악인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시편 59:14–15).”
14절은 6절의 반복입니다. 15절에서는 그들이 밤새 먹을 것을 찾지 못하길 구합니다. ‘밤을 새우려니와’라는 말은 사실 ‘으르렁거리다’라는 다른 의미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 비참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두 절은 두번째 연의 후렴이고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편 59:16–17).”
결론부의 후렴은 10절의 후렴과 같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다윗이 찬송하는 내용은 주의 힘, 주의 인자하심, 주님이 자신의 요새 되심 그리고 자신을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찾는 원수들은 밤새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고 울부짖겠지만, “나는…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생명을 찾는 원수들은 굶주리겠지만 다윗은 만족할 것입니다. 요새 곧 높은 산성이신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누리고,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이 기도는, 이렇게 찬송으로 마치게 됩니다.


5. 교훈과 적용(13b; 벧전 2:21)
시편 59편을 마치면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인하여 미움을 당할 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21).”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무고히 고난을 당하고 미움과 적대를 당하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원수들의 멸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구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끝까지 알게 하소서(13b).” 이것이 우리가 그 자리에서 구할 최고의 기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자신을 떠나지 못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신자는 그 자리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이고 하나님의 영예를 생각하는 자입니다.
둘째로, 우리 기도의 담대함에 관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허물과 죄가 없으므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는 단지 우리의 떳떳함, 당당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합니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의로움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의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로움을 우리 죄악을 가져가시는 주님과 바꾸게 됩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그리고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의로움에 기대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지는 유일한 의로움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 밖에 없습니다. 거룩을 추구하며 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