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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5). 배신의 자리에서 하나님 신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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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5). 배신의 자리에서 하나님 신뢰하기

시편 55:1-23, 베드로전서 5:7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1-29

말씀내용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픈 경험은 믿었던 친구의 배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믿는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 그리고 눈치 조차 챌 수 없을 만큼 내게 친밀했던 사람의 배신 보다 쓰고 아픈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일 수도 있고, 연인이거나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뜻을 함께 하고 오랜 시간 함께 싸워왔던 동지일 수도 있습니다. 배신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고 쓰린 경험이지만, 믿었고 친밀했던 사람의 배신은 그 만큼 더 쓰라립니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시편 55편이 갑자기 배신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52편, 54편, 55편이 배신 시리즈 시편이라고 할만큼, 배신이라는 주제를 이어서 다루고 있습니다. 52편은 에돔 사람 도엑의 배신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54편은 십 사람들의 배신을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도엑의 배신 보다는 더 깊은 상처를 다윗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 시편 55편은 13절에서 말하듯이,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의 배신입니다. 본문이 누구를 특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다윗의 모사였다가 압살롬의 반역 때, 압살롬에게로 붙었던 아히도벨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학자들 중 다수는 이 시편이 아히도벨의 배신을 다루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52,54편에 이은 55편의 배신의 주제는 점점 더 강도가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배신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만일 여러분의 인생에 이런 배신을 겪어보았다면, 여러분은 그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도가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55편은 믿고 의지하는 친구의 충격적 배신으로 좌절하는 사람의 절망감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이 바라는 것은 그 고통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다윗의 이런 정직한 심정과 태도를 통하여 본문은 비슷한 상황 속에 처한 성도들을 향한 영적 교훈과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1-8절은 다윗의 간구입니다. 다윗은 고통스러운 자신을 하나님께서 봐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 두려운 상황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합니다. 두번째로 9-15절에서 다윗은 그렇게 배신을 하는 행악자들이 가득한 도성을 보며 슬퍼하면서 그런 악인들을 멸망시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마지막은 16-23절인데, 다윗은 이 쓰라린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선언하고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향해 이런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1. 배신의 쓰라린 현실에서 드리는 간구 (1-8)
이제 우리는 첫번째 부분인 1-8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을 먼저 보지요.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여기서 다윗의 간구는 네 가지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시고.. 숨지 마소서..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입니다.
네번째 간구를 제외하면 귀를 기울이시거나 숨지 않으시거나 (몸을) 굽히시는 것은 모두 신인동형론적 표현들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모두 다윗의 간청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시사해주는 표현들입니다. 특별히 여기 ‘숨지 마소서’라는 표현은 다소 흥미로운데, 신명기 22:4에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신명기 22:4).” 여기서 어떤 단어가 ‘숨지 마소서’와 같은 단어이겠습니까? ‘못 본 체하지 말고’입니다. 즉, 이 단어는 긍휼을 베풀지 않고, 도와줄 의사가 없다거나 간구하는 것을 위선적으로 여기지 말아달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이런 쓰라린 고통 가운데 있는 나를 그리고 내 기도를 못 본 척하지 마시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을 때, 신자들이 아파하지 않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아프고 쓰리고 힘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자신의 심정을 2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다윗의 불안정한 상태가 세 개의 단어로 표현됩니다. 근심, 편하지 못함, 탄식함입니다. 특벌히 ‘탄식한다’는 표현은 혼란스러워서 시끄럽고 난리가 난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가까운 친구, 믿는 동료로부터의 배신을 겪은 사람이 이런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위선이기 쉽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속일 생각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같은 영적 거인의 기도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시편은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3-5절은 다윗이 느끼는 자신의 처지를 더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3절입니다.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시편 55:3).”
원수의 소리는 그들이 떠드는 소리이거나 다윗을 모욕하고 위협하는 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을 모욕하고 위협하는 소리들이 귀에 쟁쟁할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괴로움과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마치 돌을 던지거나 나를 향해서 굴리는 것처럼 모든 악한 말들과 행동들을 쏟아냅니다. 그것은 다윗은 ‘죄악을 내게 더하며’라고 표현합니다.
4절에서 다윗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시편 55:4).”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심정을 ‘심히 아프다’는 것 말고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심히 아프다’는 표현은 임산하는 여인이 심한 진통을 느끼는 가운데서 온 몸을 비트는 것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느끼는 아픔은 물리적 고통이 아니라 내적 고통입니다. 또한 그는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만이 느끼는 두려움, 사망이 주는 공포감을 묘사합니다. 이 감정은 5절에서 이어지는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편 55:5).”
다윗은 공포에 사로잡혀 그 공포가 덮어 그를 질식시키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럴 때 사람이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덮고 있고 질식시킬 것 같은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루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백전 노장입니다. 그 많은 전쟁터에서 그는 죽음의 공포를 수없이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공포감의 실체를 겪어서 아는 사람으로서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과연 다윗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 이런 마음의 상태와 공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쩌면 이것은 우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때로는 겪기도 하는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만일 우리가 이런 마음의 상태를 겪고 있을 때, “내가 믿음을 가진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 믿음은 거짓된 것인가?”라고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이런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저는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731-1800)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뉼 피로다”하는 찬송(새찬송가 258장)과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참 신기하도다”(통일찬송가 80장) 등 많은 찬송시를 쓴 시인입니다.
윌리엄 쿠퍼의 우울증은 그로 하여금 언젠가 이성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의 공포심이 자신을 짓누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안고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자살 기도는 감사하게도 실패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포감, 우울감과 싸우면서 그는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야했고, 그런 가운데서 주옥 같은 찬송시들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참 신기하도다”라는 찬송의 우리 말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검은 구름 우리들을 뒤덮을지라도
그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지키네
저는 이 기회에 여러분에게 이 찬송시의 전체를 읽어드리길 원합니다. 그 시의 원제는 “하나님은 신비하는 방식으로 운행하시네(God Moves in a Mysterious Way)”입니다. 시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존 맥아더, 『고난의 능력』)
하나님은 신비하게 운행하시며 기적을 행하시네
바다를 발등상 삼으시고 폭풍우를 타시네
측량할 길 없는 깊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솜씨로
자신의 밝은 계획을 측량하시고, 주권적인 뜻으로 일하시네
너희 두려워하는 성도들아
새로운 용기를 가질지어다
먹구름 짙게 드리워도
큰 자비와 축복
너희에게 임하리라
주님을 가벼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믿어라
찌푸린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 숨기시네
그분의 목적은 빠르게 성숙하고
시간마다 이뤄져 가도다
싹은 쓴맛이 나더라도
꽃은 달콤하겠네
맹인 같은 불신앙은 그릇되기 마련이고
그분의 일을 헛되이 찾으나
하나님은 스스로 해석하시고
그분의 뜻 밝히 밝히시네
존 파이퍼는 윌리엄 쿠퍼의 짧은 전기에서 특별히 이 찬송시의 한 대목, “찌푸린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 숨기시네.”에 초점을 맞추어, 그 제목을 [하나님의 숨겨진 미소]라고 붙였습니다. 윌리엄 쿠퍼는 고통과 우울감, 그리고 공포감과 싸우면서, 거스를 수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런 절망감 속에서 그 뒤에 미소지으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이 시편에서 그런 다윗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덮어 질식시키는 공포감 속에서 믿음은 이런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게 만들고 보게 합니다.
우리는 다윗을 넘어, 그리고 윌리엄 쿠퍼를 넘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런 고뇌와 고통과 공포감을 느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세상의 악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셨고 그것에 의해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드리신 기도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다윗에게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위대한 메시야이신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아픈 자리를 떠나 멀리 도망하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합니다. 6-8절입니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시편 55:6–8).”
다윗은 차라리 원하는대로 날아가 광야에 찾아드는 들비둘기가 부럽습니다. 이 자리만 피할 수 있다면,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느낍니다. 그가 ‘광야에 머무르리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가장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했을진대,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사람들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에게는 사람들이란 폭풍과 광풍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폭풍과 광풍을 피할 피난처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광야가 그에게는 피난처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광야로 도망하고 싶은 심정을 겪은 것은 비단 다윗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갈멜 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는, 이세벨이 그의 목숨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광야로 피하여 숨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그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예레미야 9:2).” 예루살렘의 패역함, 그 주민들의 죄악상을 보고 있던 선지자는 차라리 그 패역한 무리가 없는 광야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드러난 다윗의 심정입니다.


2. 행악자 가득한 도성 (9-15)
다윗은 사실 가까운 친우로부터 배신을 당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패역함, 죄악성을 다윗은 보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도성에서 보는 것은, 강포와 분쟁, 죄악과 재난, 악독, 압박과 속임수입니다. 강포는 잔인하고 잘못된 폭력입니다. 분쟁은 오래 지속되는 다툼을 의미합니다. 10절에서 ‘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라고 말하는 것은, 공포와 분쟁이 성벽의 파수꾼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행악자들이 성벽 위를 걸어다니며 파수를 한다고 하니 그 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11절입니다. 압박은 사회적 불의에서 오는 것이고 속임수는 단순한 거짓을 가리킵니다. 이런 압박과 속임수는 성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비즈니스를 지배하게 되고 사회는 무자비하고 부정직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를 묘사하는 내용처럼 읽혀집니다. 성경은 고대와 현대 사이에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다윗은 여기서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하나는 ‘그들을 멸하소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라는 말은 “그들의 말을 완전히 혼란하게 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일을 생각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들의 말이 혼잡해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협력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시편의 정중앙지점에서 다윗은 가장 중요한 핵심적 사건을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이 시편을 처음부터 읽어내려오던 독자는 왜 다윗이 이렇게 심피 아프고 고통스러워 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12-14절입니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시편 55:12–14).”
그것은 바로 다윗의 가장 가까운 친구요 동료의 배신이었습니다. 에돔 사람 도엑 같은 원수의 배신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지파 십 사람들의 배신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평가를 받고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 어려서부터 함께 재미있게 교제하며 함께 성소에서 있던 친구입니다. 가장 믿을만한 친구, 밀접한 친구입니다. 다윗이 너무나 잘 안다고 확신했던 친구인 것입니다. 그가 다윗을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15절에서 이렇게 다시 간구합니다.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시편 55:15).”
거의 모세 시대, 광야에서 권위에 도전했던 고라의 자손들이 어떤 심판의 죽음으로 죽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기도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모두 삼킨 것과 같이, 다윗은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라는 말로써 그런 심판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믿음과 확신 (16-21)
이 시는 16절부터 약간 분위기가 바뀝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은 이 아프고 비참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와 확신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향해 권면하기까지 합니다.
16절을 보지요.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시편 55:16).”16절은 ‘나’라는 인칭대명사로 시작되는데, 이 ‘나’는 이전의 내용과 완전히 분리된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개의 영어성경은 ‘But I(그러나 나는)’라고 번역했고(ESV, NLT), 또는 ‘As for me(내 경우에 있어서는)’라고 번역을 했습니다(NIV, NASB, KJV). 그리고 우리말 성경역본 중에서는, ‘나만은’이라고 번역을 했거나(공동번역), ‘오직 나는’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했습니다(우리말성경).
이런 상황에서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고 태도입니다. 다윗도 앞에서 그것을 충분히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자리에서 구원하여 내실 것을 알고 믿고 그분께 부르짖습니다. 16절은 사실 확신에 찬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7-19절에서도 그 확신을 세세히 보여줍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시편 55:17–19).”
17절에서 다윗은 하루 세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근심하여 탄식하리니’라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드리는 기도는 물론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몹시 몰입되어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자신의 아픔 속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조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1-2절에서 기도할 때와 달리, 신뢰와 확신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들으십니까? 18절입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시편 55:18).”
모든 전장에서 다윗을 구원하여 그를 평안하게 하심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전쟁터에서 다윗이 해를 입지 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인생의 경험은 지금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거의 은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뜨리는 배신자들과 행악자들을 낮추실 것을 다윗은 확신합니다. 물론 그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심은 그들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의 악한 궤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20-21절에 묘사하는 행악자들의 그 모습, 그 태도가 말입니다.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편 55:20–21).”
그들의 행위의 본질은 배신입니다. 화목한 자를 공격하고, 언약을 깨는 자들입니다. 우유기름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 유일하게 여기서만 사용된 단어인데, 요즘말로 하면 버터(butter)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버터처럼 미끄러지는 말을 청산유수와 같이 할지라도, 그 속에는 전쟁을 벌이려는 마음이 가득하고 뽑힌 칼이 날카롭게 숨어 있는 것입니다.


4. 권면 (22-23)
끝으로 다윗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권면을 합니다. 22절을 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55:22).”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배신으로 갚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우리 성도의 본분이 아닙니다. 성도가 할 수 있는 일, 오직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사도 베드로는 짐을 염려로 번역하였습니다. 왜 염려 만이겠습니까? 배신으로 말미암아 비통한 마음, 그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권면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이 더 이상 요동하지 않도록 붙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까?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끝으로 다윗은 악한 자의 파멸을 위해 다시 기도합니다. 이것은 내가 복수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것 조차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편 55:23).”
그러나 이 기도에서도 다윗은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는 자신의 믿음의 고백과 결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만이 이 힘든 배신의 시간에 자신을 붙들어주는 힘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드리는 고백입니다.
5. 적용적 교훈
간단하게 이 말씀을 통해서 얻는 적용적 교훈을 정리하겠습니다. 온 세상은 악과 거짓과 압제로 가득합니다. 거대한 악이 존재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정직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비즈니스를 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배신을 당할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배신에는 배신으로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 악과 거짓과 압제가 판치는 두려운 세상에서 오직 주님만이 의와 평강과 안전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두번째 서신의 결론으로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베드로후서 3:18).”
주의 은혜와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감이 없이, 우리의 믿음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가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배신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실 다윗의 배신 경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위대하신 메시야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그 밤에 주님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주님께는 그 모든 제자들보다 더 친근한 친구가 계셨습니다.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토록 당신을 배신하지 않으실 하늘 아버지, 그 한 분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결국 이것을 알고 경험하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브리서 13:5–6).”
아멘! 아멘! 아멘! 언제나 우리가 받는 고통 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