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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4). 배신을 당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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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4). 배신을 당할 때

시편 54:1-7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20-01-15

말씀내용
리처드 필립스는 오늘 우리가 상고할 시편 54편을 가리켜, 희망을 잃어버린, 버림받은 그리고 배신 당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시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시편은 종종 성도들이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였을 때에 듣는 특효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사람의 영혼의 깊은 곳을 특별히 정서적인 차원에서 드러내는 것이 시편입니다.


1. 상황
앞에 52편이 에돔 사람 도엑을 다루었고, 53편이 나발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다루었다면, 54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54:3) 원수들을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에서 시작해서 적어도 59편까지는 다윗을 대적하는 원수들 앞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의 표제어에는 이 기도가 드려진 상황을 보여주는 말이 있습니다.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라는 것입니다. 언제 십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까? 사실, 이들이 사울에게 다윗의 행방을 알려준 사건은 성경에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무엘상 23장입니다. 사울을 피하여 이리 저리 도망하던 다윗과 그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가족 외에도 수 백명에 달하였습니다(삼상 22:1-2). 한동안 아둘람 굴에 숨어있던 다윗은, 어느날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서 타작 마당을 탈취하여 곡식을 모조리 가져간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처지였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십니다(삼상 23:2). 당연히 다윗이 함께 한 사람들은 반대합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날 잡아가시오”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묻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일라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과 부하들이 우려했던 그 일이 일어납니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일라는 뒤로는 도망할 수 없는 막다른 지형에 세워진 성읍이었습니다. 사울에게는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다윗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때문에 이 성읍이 사울의 손에 멸망당하기를 원치 않았기에(삼상 23:10)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사울에게 내어주지만 않는다면, 해 볼만 하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일라 사람들이 배은망덕하게도 자신들을 블레셋에서 구해준 다윗을 배신하고 그를 사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 배신감을 안고서 그일라를 떠나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의 산골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십 광야의 수풀에 숨어 있을 때, 이를 알게 된 십 사람들은 사울에게 사람을 보내 다윗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사무엘상 23:19입니다.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다시 한 번 깊은 배신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 사람들은 다윗이 속한 같은 지파인 유다 지파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말합니다. “에돔 사람 도엑이 다윗을 배신했을 때에는 다윗이 거의 놀라지 않았겠으나(삼상 22:22) 이제 다윗은 자기와 같은 지파인 십 사람들에 의해 거절 당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결국 다윗이 십 광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은 다시 다윗을 잡으러 군대와 함께 오게 됩니다. 이것이 시편 54편의 첫번째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 사람들과 다윗이 얽힌 이야기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십 사람들은 이후에도, 다윗이 십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었을 때에, 사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게 됩니다. 사무엘상 26:1입니다.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사무엘상 26:1).”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였던 십 사람들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긴 것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해동안 사울에게 쫓겨 도피행각을 벌이던 다윗은 혼자도 아니고 가족들과 수 백명의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지쳐있었을지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다윗은 자기 지파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대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자기 지파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사랑하여 이방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줄지언정, 그 자신은 그 누구의 도움도 얻을 수 없는 처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의 표제어에 짧게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쓰여진 이 말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2. 구조
이 시편은 그 구조가 교차댓구법(chiasm)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에 여러분에게 설명드린 바 있는 교차댓구법은 본문의 정중앙으로부터 밖으로 나아가면서 그 내용이 대칭을 이루는 방식으로 쓰여진 글의 구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에서 정중앙은 4절이지요?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이 구절이 이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교훈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신뢰를 잘 표명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다윗은 1-2절에서는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고, 마지막 7절에서는 구원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기도를 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5절에서는 기도의 응답을 밝힙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4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기에 이 시편의 핵심 교훈이 있습니다.
또는 약간 수정하여, 4-5절이 중심구절로서, 핵심 교훈을 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드러내고 다른 한편 악한자들이 멸망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중심 구절의 앞부분인 1-3절에서는 포악한 자들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나오고, 뒷부분인 6-7절은 승리를 확신하는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낙헌제를 드리겠노라고 맹세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3. 간구(1-3)
먼저 1-3절을 살펴볼텐데, 여기에는 다윗의 간구가 담겨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변호해주시고 판단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왜 사용되었을까요? 여러분도 이렇게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나를 구원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십니까? 다윗은 어떤 심정으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해달라고 한 것일까요?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듯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 성품, 그가 살아가는 삶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 이름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여기서 다윗이 ‘주의 이름으로’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본성이나 성품을 따라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할 때, 기도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은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 지식과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 사람들은 다윗을 두 번이나 배신함으로써 믿을 수 없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시길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라고 구합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주의 힘으로’ 변호해달라는 것입니다. ‘변호한다’는 말은 사실, ‘옹호하다, 신원하다. 무죄를 선고하다, 억울함을 풀어주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 변호사의 역할과 판사의 역할을 모두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변호해주시고, 자기를 무죄라고 판단해달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좀 더 강화된 요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처럼 들으시는 귀를 가지고 계신 것처럼 조금 과감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고 간절하게 다윗은 기도합니다.

3절은 다윗 자신이 어떤 경위로 이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 본문입니다.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여기에 낯선 자들과 포악한 자들은 같은 사람들이고, 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본래 ‘낯선 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십 사람들, 혹은 자신을 쫓는 사울 왕을 가리킬테니 이방인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타난 낯선 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에게 고발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입니다. ‘포악한 자들’이라는 말은 ‘두려워하게 하다, 공포스럽게 하다, 떨게 만들다’라는 뜻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포악한 자들은 놀람을 야기하는 자들, 공포스럽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물론 십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사울 왕을 포함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다윗의 생명을 ‘수색합니다.’ 사울 왕은 물론 다윗을 잡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양 생각하면 모든 힘을 이 일에 쏟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울 왕의 의도에 협조하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십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일어나 다윗의 생명을 수색하는 사냥개와 같습니다. 다윗은 그 사냥개들에게 쫓기는 짐승처럼 자신을 느끼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다윗을 공포에 떨게 할지라도, 그들의 본질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다윗은 압니다.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둔다는 말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십 사람들이 만일 하나님을 사람 보다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다윗의 행방을 사울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츠 델리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사람만 사울의 맹목적인 분노의 도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 원리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내 삶과 신앙의 근본인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내 인생을 끌고 가는 힘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근저에 하나님 경외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4. 확신(4-5)
4절로 가면, 분위기는 반전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바로 이 구절이 54편의 핵심 교훈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다윗은 1-3절에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변호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4절에서 그는 더 이상 간구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확신이 피력됩니다. 그는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이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사실, 4절은 우리 개역개정역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바, 히브리말로는 ‘보라’라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한국어 성경 중에서는 ‘우리말성경’이 이 단어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을 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며 여호와는 내 영혼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어성경 가운데 ESV, NASB, KJV 등도 이 단어의 의믈 살려서 번역을 했습니다. ‘보라’는 의미의 이 감탄사는 NIV성경이 번역했듯이, ‘확실하게(surely)’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다윗의 확신을 한층 강화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라고 할 때, 사용된 표현은 군사적 동맹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러 오실 것임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통치자이신 주님은 다윗의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분, 지탱해 주시는 분이심을 그는 압니다. 말하자면,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지, 자기 생명을 수색하는 사울 왕이나, 사울 왕에게 동조하는 십 사람들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이 확신은 5절로 이어집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기에, 이것을 확신하는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구합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여기서 다시 다윗은 ‘주의 성실하심으로’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주의 이름으로’ 그리고 ‘주의 힘으로’라고 말했던 다윗은 여기서 ‘주의 성실하심으로’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근거는 언제나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과 성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간구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 모든 성도의 기도의 근거입니다. 주의 이름, 주의 힘, 주의 성실하심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내가 기도의 근거이거나,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야 할 근거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실하심은 하나님의 진리, 진리성, 언약 백성을 향한 성실하심을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5. 감사(6-7)
끝으로 우리는 다윗이 6-7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아는 듯 보입니다. 6절입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낙헌제(freewill offering)는 필수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감사와 찬송의 제사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낙헌제를 드리겠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전제하여 하는 말입니다. 과거, 자신의 삶에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압니다.
다윗은 또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감사한다는 말은 그냥 홀로 앉아서 감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대중 앞에서 인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여러분의 감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집니까? 물론 우리의 삶에서 큰 회중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거나 모이는 그리스도인의 작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모임에서 우리는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인 것입니다. 공개적인 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감사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될 때, 이것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가치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감사가 많아져야 하고,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함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낙헌제를 드리고 감사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우리의 모든 감사의 근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시 119:68).”

잘 알려진 감사의 시편인 시편 100편을 보십시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편 100:1–5).”

여기서도 시인이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알고 맛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고 맛보았으며 지금 매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성호를 세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1-3절에서는 ‘엘로힘’이라는 성호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다가 4절에서 다윗은 ‘주께서는’이라고 말할 때, ‘아도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나의 주라는 의미인데 세상의 주재,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인격적이고 언약적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하여 직접 계시하여 주신 이름입니다. 다윗이 6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은 언약의 이름, 약속이 담긴 이름, 인격적 관계 속에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인 여호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7절을 보겠습니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다윗이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감사의 구체적 이유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난’은 위기의 모든 국면을 포함하여 하는 말이고, 지금 다윗이 처해있는 위기의 순간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다윗이 과거형으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지시고…보게 하셨나이다’는 모두 과거형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확신을 표시하는 완료형’으로 예언적 완료 혹은 결과를 기대하는 완료형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은 자기가 앞에서 간구한 내용(1-3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완전히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자신을 위기에서 건져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헌제를 드리고 감사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신뢰와 확신에 대한 놀라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6. 교훈과 적용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의 기도는 그의 간구대로, 그의 확신대로 응답되었습니까? 우리는 다시 사무엘상 24장으로 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3:27-29이니다.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간구를 따라 응답하셨습니다. 그의 확신대로 일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 응답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역사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우리는 모든 배신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시는 그분을 아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윗은 인생 속에서 수 없이 배신을 겪고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망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은 자기 땅에 오셨고, 온 세상의 왕으로서 오셨지만 거절을 당하셨고,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팔리셨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찬송하던 군중들로부터 배신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버림을 실제로 당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님을 지켜주었던 것은,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그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뢰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옥문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을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주께서는 우리 마음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간에, 우리는 망가지는 대신 도리어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삶을 통해서 반영하며 살아가는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져 갈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구합시다. 이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배우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