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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3). 어리석은 자가 당할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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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3). 어리석은 자가 당할 수치

시편 53:1-6, 로마서 3:10-12, 로마서 1:18-23 / 김형익 목사 / 수요예배설교 / 2019-12-18

말씀내용
1. 쌍동이 시편(시 14)
시편 53편은 14편과 거의 유사하여 쌍동이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약간의 상이한 부분들 때문에, 일란성 쌍동이가 아닌 이란성 쌍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두 시편은 하나님의 성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4편은 하나님의 성호로 여호와가 4회, 엘로힘이 3회 사용되었는데, 53편은 오직 엘로힘만 7회 사용되었습니다. 전에 한 번 설명 드린 바 있지만, 시편의 제2권(42-72편)을 포함하여 73-83편까지를 ‘엘로힘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편들의 모음에서는 하나님의 성호가 주로 엘로힘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호의 차이 외에도, 14편의 1-4절과 53편의 1-4절이 거의 동일하고 마지막 부분인 14:7과 53:6도 유사합니다. 하지만 14:5-6과 53:5은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줍니다. 두 부분을 한 번 보지요.
먼저 14:5-6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그리고 53:5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왜 이렇게 비슷한 시편이 반복된 것일까요? 그리고 그 차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미 쓰여진 시편 14편을 역사적 정황에 맞게 편집한 것이 53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 문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을지라도, 거의 동일한 시편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 시편이 가르치는 교훈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이 그들 언어의 문법 체계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을 때, 뭔가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많이 사용한 것이 반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 이 시편은 이미 14편에서 상고한 바 있으니 건너 뛰어도 되겠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될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두 시편의 내용의 차이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 직면한 상황을 시사한다고 보면서 시편 53편을 국가적 위기를 만났던 여호사밧 때나(역대하 20) 히스기야 때(왕하 18-19)의 시편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표제어에서 하나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마할랏에 맞춘 노래]라고 했는데, 마할랏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악기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학자들 간에는 하프 혹은 플룻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나눠지기도 합니다.


2. 반복—강조된 교훈
유사한 시편이 반복된다는 것이 그 교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시편이 주는 교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시편은 신자들이 살아가는 불신 세상의 영적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들의 세상이고, 무신론적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악인들에게 잡아 먹히는 상황입니다. 이 시편은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세상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비단 21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된 이래, 한 번도 그쳤던 적이 없는 바,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은 4절이 묘사하듯이, 악인들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 상황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알아야 하고 이 확신 위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힘들게 하는 세상의 어떤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단지 그들 몇 사람이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믿음을 쓰러뜨리려고 하는 것은 몇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괜한 근거 없는 낙관론에 떨어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그 사람들로부터 우리 신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선은 없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자신들의 기대와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로마서 3장에서 다시 인용되었습니다. 로마서 3:10-12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 전체를 통해, 시편 53편의 내용은 세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된 셈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갈 수 없는 교훈의 핵심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3. 나발의 이야기 (삼상 25)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히브리말로 ‘어리석은 자’는 나발입니다. 1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나발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우리는 다윗 시대의 나발을 알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다윗은 쫓기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재산을 축내지 않았고 보호하기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 나발이라는 인물은, 목축을 하는 거부였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비가일을 아내로 둔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자였습니다(삼상 25:3). 양털을 깎는 날은 목축을 하는 이들에게는 추수와 같은 잔치의 날이었기에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 은혜를 구하게 하지만, 이 좋은 날에 나발은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하여 빈손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이름값을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한 다윗은 칼을 차고 부하 사백명과 함께 나발을 치러 나오고, 이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음식과 함께 종들을 앞서 보내 다윗을 지연시키고 자신도 다윗을 향해 갑니다. 길에서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말로써 흥분한 다윗의 마음을 달랠 뿐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두게 하는 말을 합니다. 그녀의 말입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삼상 25:25).”
사실, 시편 53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사무엘상 25장의 나발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인물로써 시편 53편이 설명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 실천적 무신론자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사무엘상 25장의 나발과 연관되는 시편 53편의 전후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시편 52편은 사울의 목자장인 에돔사람 도엑을 ‘포악한 자(위대한 용사)’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는데, 도엑은 나발이 등장하기 전, 사무엘상 22장에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53편 뒤에 이어지는 54편의 표제어는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라고 했는데, 십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발 사건 전과 후인 사무엘하 23장과 26장에 나옵니다. 어쨌든 53편은 사무엘상의 나발이라는 인물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4.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삶(1-4)
시편 53편은 1-4절에서 어리석은 자, 나발의 생각과 삶을 묘사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자기 마음에 말하는 자입니다. 고대 세계에 요즘과 같은 이론적 무신론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절이 묘사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마이클 윌콕).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정신적으로 결핍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더 지혜롭고 세상을 잘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머리가 좋고 많은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영적 요소, 그리고 윤리적 결함을 가진 의지적 요소를 강조합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게 말씀하지만, 특히 잠언이나 시편에서 ‘어리석다’는 것은 ‘악한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 고백과 삶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세계인 자연 만물 안에 부인할 수 없도록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특정 과학자들만 알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어린 아이라도 부인할 수 없도록 당신 자신을 밝히 그 안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그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정합니다. 로마서 1:19-20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것 때문에 그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질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증거가 자연 만물에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고 섬기게 되는데, 그것이 우상숭배이고(롬 1:21-25) 불경건입니다(롬 1:18). 곧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경건은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필연적으로 불의로 이어집니다(롬 1:18). 불경건이 먼저 오고 불의가 그 열매로 나옵니다. 1절 하반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 말씀은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타락과 부패를 잘 보여줍니다. 가증한 악을 행하는 것, 그리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부패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2).”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지켜보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마지막 날에는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나 보시지만, 한 사람도 찾지 못하십니다. 여기 ‘지각이 있는 자’는 어리석은 자와 반대되는 지혜로운 자를 가리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3절을 봅니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다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어리석은 자는 이 말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인간은 선하고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본주의를 신봉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은 부분적으로 부패하고 병이 든 상태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알미니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죄의 저주 아래 놓여있고, 잘못된 원리에 의해서 행동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자기의 구원을 위한 그 어떤 것도 전혀 행할 수 없다”(로레인 베트너)고 가르칩니다. 부패한 인간은 병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엡 2:1). 하지만, 이 말은 인간이 도덕적 선을 행할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거나, 인간이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치명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인간의 기능(영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어리석은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지 않는(엄밀하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십시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어리석은 자들이 행하는 것은 밥 먹듯이 죄악을 범하고, 밥 먹듯이 의인들을 삼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악을 행하는 것은,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태연하게 그 일을 행합니다.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만 좋으면 됩니다. 그리고 4절 하반절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영적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영적 지각은 전제하고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결코 그 자리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5장의 나발에게서 이것을 봅니다. 그는 거부입니다. 큰 잔치를 벌입니다. 하지만 완고하고 행실이 악합니다. 그는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하여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의 전형입니다. 바울 사도는 시편 36:1을 인용하여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롬 3:18).
이런 자들의 세상에서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밥일 뿐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5. 심판하시는 하나님(5)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처럼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심판자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5절은 시편 14편과 가장 많이 다른 부분입니다. 이 구절에 상응하는 시편 14:5-6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께서 의인과 함께 하심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며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피난처가 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의인과 가난한 자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53:5은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쟁의 상황을 노골적으로 전제합니다. ‘대항하여 진 친’ 그리고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뼈를 흩으신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죽어 매장되지도 못하는 비참한 상태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될텐데 이 일의 주체는 바로 의인입니다. 의인들이 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밥이 되었어야 했던 하나님의 백성이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5절은 ‘거기에서’라고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역에서는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곳에서’가 그 단어를 가리킵니다. 이 말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던 바로 ‘거기에서’라는 말입니다. 어딘가 두려워할 곳으로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큰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레위기는 이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레 26:36).”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두려움과 수치를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없다고 여겼던 그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나발의 삶은 시편 53편의 주석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하여 돌려보낸 나발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벌이고 크게 술에 취하여 기분 좋게 잠이 듭니다. 이튿날 아침, 아비가일은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남편에게 알려줍니다. 아무 두려움이 없던 나발은 이 말을 듣자,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삼상 25:37). 표현할 수 조차 없는 큰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발을 치셨고 그는 죽게 됩니다. 살았다고 하나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고 인간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인생의 비참한 마지막입니다. 5절이 묘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6. 구원하시는 하나님(6)
우리는 이제 6절을 보게 되는데, 5절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했다면, 6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심판은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비록 악인들—어리석은 자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어리석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죄의 대가를 치룰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사 즐겁고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악인들, 어리석은 자들, 나발과 같은 자들에게 삼키움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신자들은 이 은혜의 날, 구원의 날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마귀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증서를 도말하셨고, 우리를 율법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것이 본래 모든 아담의 자손이 그리고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영적 형편이고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두려움이 임할지라도, 주의 백성에게는 즐거움과 기쁨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답 없어 보이는 현실을, 삼키움을 당하는 것 같은 현실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심판하시고, 한 순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두려움이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고 그들을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