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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6) - 하나님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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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6) - 하나님의 자녀

요한일서 2:28-3: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6-12

말씀내용
2:28부터 요한일서는 내용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사도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지는 사람은 순종이라는 도덕적 테스트, 형제 사랑이라는 사회적 테스트, 그리고 교리적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가 말했던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2:3~4,13~1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2:5~6),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2:9~10),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는 사람(2;24; 27~28)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는 새로운 개념으로 그리스도인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3:1과 3:2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29)”는 표현도 같은 개념을 전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으로 요한일서는 주제의 전환을 맞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자녀
사도는 2:28에서 4:6까지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특징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며(3:9) 의를 행하고(2:29)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3:10,14; 4:7)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4:1~6)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이 서신을 통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너희가 이 조건들을 가지고 너희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점검하고 확신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거기에 확신은 자리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사귐도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가 긴가 민가 하는 신앙에 머물러서 두려움 가운데 인생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얻은 구원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 복음을 마치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심리적 위로나 행복한 느낌을 주는 것을 이해하고 접근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차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렇게 작고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원을 다루고 있으며, 그 영원한 행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셋으로부터 인류가 번성할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식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이 죽고 사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A.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먼저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29).” 사도는 앞에서 말해왔던 것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빛이시므로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고(1:5이하),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이며(2:3이하),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삶입니다(2:15).
이렇게 의를 행하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시이고,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자녀’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자녀라고 말할 때, 자녀가 가지는 상속권과 같은 차원에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의 로마 제국에서는 장성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그를 자신의 후계자, 상속자로 삼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우리의 구원을 ‘입양된 아들’의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도가 ‘자녀’라고 할 때 쓴 단어는 법적 권리나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는 입양 개념의 아들이 아닌, 생물학적 친자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사도는 하나님께로서 났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사도는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구원얻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면, 그들은 의를 행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영지주의자들이 지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헛된 거짓말을 반박합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위축되어 있는 참된 신자들을 이 말씀으로써 격려하고 있습니다.

B. 하나님의 사랑!
사도의 논지는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는 지금 신자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신자들에게 너희 자신이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특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이고 신분인지를 알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의 영광을 아는 것이야말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초이고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비극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거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3:1)?” 즉, 무엇이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죄인의 전향이나 죄인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죄인 자신이 행하는 노력이나 수고가 없습니다. 비록 성경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음에도(요 1:12) 그것조차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요 1:13). 혈통, 즉 누구의 자손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하나님의 자녀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또 육정 즉 육신의 뜻을 가지고 인간이 자기 의지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를 주어야겠다’고 목사가 결정을 하고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인간의 의지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엡 2:8~9). 그것을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만이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내는 열쇠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수고를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은혜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얼마나 강조적인 용법을 사용하는지를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먼저, ‘보라’는 말로써 사도는 우리가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할 시간을 가지고 그 사랑이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스며들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어서 사도가 말하는 방식,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라고 말하는 것도 강조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마 8:27).” 예수님을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종류가 다른, 차별화된 분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여기 사랑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많이 있지만,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든 사랑은 그 모든 사랑과는 차별화된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랑을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무한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온전한 의미에서 행하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이 세상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여 받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불완전합니다. 세상에 영구한 사랑은 없습니다. 다 식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세상에 무한한 사랑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한계가 있고 조건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영구한 사랑을, 무한한 사랑을 죄인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이 사랑이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사랑입니다.

C.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
사도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소망에 대해서 말합니다. 3:2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만일 이 말이 격려와 위로가 되지 못한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모든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합니다. 자신의 삶이 어떤 자리에 처해 있든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묵상하고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상황에 지배당하고 압도당하는 삶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세력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가 누구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처해 있는 현재의 형편과 상황에 그 약속의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즉, 상황이 말씀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상황을 언제나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그들 자신이 잘나고 못나고 능력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현재에도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장래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즉 재림하실 때에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영광의 주님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실로 인간이 가진 최고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장래에 우리는 더 분명하게 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오늘 본문은 그것을 더 영광스럽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고린도후서 3:18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변하게 됩니까?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에,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부분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아무리 큰 은혜를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변화를 입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요한은 그 이상의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온전하게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롬 8:21).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도는 나아가서 3절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뭔가를 이루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뭔가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소망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이고,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들의 장래의 영광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누리는 영광과 누릴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다니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모를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들인지를 세상이 몰라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세상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과 그 신분을 결코 인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3:1 하반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이라고 말합니다. 왜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알아보고 경의를 표할 수 없겠습니까? 사도의 대답입니다. “그를 알지 못함이라.” 네, 그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에 그 자녀들도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존귀하게 여기는 대신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는 없도록 주님께서는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실하게 알아보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1 하반절의 말씀을 뒤집어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를 알아봅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본능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사랑스럽습니다. 어떻게 이런 감정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은 바 된”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롬 5:5). 여기서 형제를 향한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나의 형제, 하나님의 자녀가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외적 조건이나 끌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형제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미 충분히 사랑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주제입니다.

2. 교훈과 적용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혹시 대충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럴 지도 모르지 하는 식으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알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여러분은 의를 행하십니까? 여기서 의를 행한다 하는 말은, 완벽한 행위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이 여러분의 삶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을 벌고 잘 살고 싶은 꿈과 열정이 여러분의 삶을 끌고 가는 동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여러분의 삶을 끌고 가는 힘입니까? 이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의를 행하는 삶의 특징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이런 삶이 자기 노력과 의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의를 행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소망을 바라보고 무엇이 죄인인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신분으로 바꾸어 주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 그 사랑을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자신이 장래에 누리게 될 영광을 모든 상황에서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신분에 걸맞는 삶의 자태를 드러내면서 살아가도록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깨닫고 인정하신다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 기쁘신 뜻을 따라 낳아 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여전히 내 의지와 힘으로 믿어보겠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최고의 장애물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그 큰 사랑입니다. “오, 주님! 제게도 그 은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사, 그 자녀됨의 영광에 영원히 이르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계시는 여러분이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복된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