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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 - 그리스도인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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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 - 그리스도인의 확신

요한일서 5: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2-28

말씀내용
오늘부터 우리는 요한일서를 상고합니다. 필요하다면 요한일서에 이어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강해도 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요한서신의 강해는 금년 연말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요한일서를 강해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 시대의 교회가 처한 상황과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이 매우 밀접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일반적인 이유 외에도, 우리 벧샬롬교회가 참된 진리 안에서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요한일서의 메시지를 나누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1. 우리 시대의 교회가 처한 상황
어떤 점에서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의 교회 상황과 우리 시대의 교회가 처한 상황이 유사한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요한일서가 쓰여진 시대의 교회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일서는 대략 주후 80년에서 90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에 의해서 쓰여진 편지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당시 교회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쓰여졌습니다.
A. 요한일서가 쓰여진 시대의 교회 상황
요한일서가 쓰여진 시대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구체적인 상황은 거짓된 교리와 거짓된 도덕적 가르침의 문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거짓 교리와 도덕은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교리와 도덕에 있어서의 혼돈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때가 주후 80년 이후라면 이미 예수님의 사도로 불리던 제자들은 다 죽었고 요한 한 사람만 남은 상황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분열되었고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는 일들도 일어났습니다(2:19). 이런 현상들을 직면한 성도들은 점차 확신을 잃어버리고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참된 기독교인가? 참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우리가 참된 진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을 그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거짓 교사들이 가르쳤던 내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거짓 가르침들과 분파들이 당시 교회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주요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1세기 말이면 영지주의라고 불리는 이단사상이 아직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전이었지만, 그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내용은 바로 이 영지주의의 주장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헬라 사상의 이원론과 기독교를 조합시키려는 일종의 혼합주의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을 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지식은 신비주의적이고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지식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믿음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이 지식을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얻었노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참된 ‘성령의 기름부음’이 무엇인지(2:20,27), 그리고 참된 ‘지식’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을 요한일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서신에서 지식을 표현하는 동사인 ‘안다’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반복하여 사용하였을 것입니다(2:3,5; 3:14,16,19,24; 4:13; 5:2). 둘째로 영지주의가 강조하던 거짓 가르침은 물질 세계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물질인 육체를 입는다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불리는데,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신 것처럼 보였다는 주장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께서 예수님과 연합하셨고 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몸의 부활이 부정되고, 우리의 구속의 근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비적인 지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플라톤이 말한대로, 육체라는 감옥 속에 갇혀있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영지주의의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복음은 거짓 복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부인하는 신비주의적 이원론에 불과한 혼합주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성육신을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바로 이런 거짓 가르침을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4:1~3).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기 전에 교회의 두드러진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2장 19절에 보면,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의 성도들이 보고 경험한 분열을 지칭한 말씀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를 나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성도들은 얼마나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겠습니까? “우리도 나가야 하는가? 저들이 정말 틀린 것일까? 나는 어떤 점에서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일어났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분명히 성도들?구원받은?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음을 분명히 알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다고 그 목적을 밝힙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이 편지, 요한일서를 쓴 배경이고 목적입니다.

B. 우리 시대의 교회 상황
여러분,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 교회의 상황을 들으면서 바로 우리 시대의 교회와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몇 가지 간단하게 짚어보겠습니다.
i. 혼돈
먼저 혼돈입니다. 우리 시대 기독교의 특징을 저는 혼돈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혼돈은 영적 무지가 낳은 결과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성경을 떠난 기독교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설교시간에 성경을 한 두 구절 읽고는 그 말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설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 신앙의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혼돈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강조한 것이 신비적 지식이었다면, 오늘날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신비주의와 주관주의가 교회에 너무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신비주의 기독교가 좋아하는 용어 중 하나가 ‘성령의 기르부음’이라는 사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로 어떤 체험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내용보다, 체험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가령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혁명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등등 자기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만들어서 섬깁니다. 기독교 복음과 진리의 객관성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주관적 복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내용, 즉 성경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천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기독교가 이단 발흥의 토양이 된다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처럼 대범하게 이단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아예 먹어치우는 시대가 언제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단들이 이렇게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교회를 허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은, 바로 교회 자신이 제공한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썰물 현상을 우리는 지난 10-20여 년 동안 경험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별을 하지 못하니, 왜 저렇게 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는지 의아하게 여깁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무엇이며, 신자(그리스도인)가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혼돈이 이 시대의 교회가 당면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혼돈의 요소는 바로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의 교회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ii. 확신의 결핍
이런 혼돈은 당연히 신자들로부터 확신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주관주의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확신은 종교적 교만의 동의어가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잘 모른다’, ‘확신이 없다’는 것이 바람직한 겸손한 태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기독교의 현실이 이런 상황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요한일서의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바로 확신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영생을 가진 구원받은 성도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려고 이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iii. 교제와 기쁨의 상실
사실, 교회의 성도들 다수가 확신을 결핍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한 참된 교제와 그 교제로부터 경험되는 기쁨 또한 앗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기독교의 현실에서 저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 바로 참된 교제와 영적 기쁨의 상실입니다. 성도들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참된 교제를 하게 될 때, 그들은 하늘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고 거기서 그들은 깊은 영적 하나됨을 확인하게 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게 일어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확신을 잃어버린 교인들이 아무리 많이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모인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에 참된 성령의 교제나 영적인 기쁨 그리고 성도들의 서로 사랑이 경험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사도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을 서신의 머리말에서 살짝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3~4).”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와 우리 벧샬롬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마다 이런 참된 교제와 기쁨 그리고 성도들의 풍성한 사랑의 넘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참된 주님의 교회가 누리는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2. 참된 기독교는 무엇인가?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요한일서 강해를 통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말씀을 상고하게 되겠지만, 지금 간단하게라도 요한일서 전체가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참된 기독교인을 분별하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 “내가 참된 신자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고, 이것은 확신을 얻기 위해서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요한일서는 나선형의 구조를 지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가면서 정확하게 나눠진다기 보다는 반복적으로 주제들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계속하는 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 요한일서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이 서신에서 다루고 있는 바, 참된 신자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주요 사항들을 정리해 본다면, 그것은 세 가지 테스트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교리?무엇을 믿는가, 둘째로 삶?믿는 것에 순종하는가, 그리고 셋째로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를 사랑하는가 입니다.
A. 교리?무엇을 믿는가? (2:18?28; 3:23?4:6; 4:14?15; 5:1,5)
참된 신자는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그 신앙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믿는 것입니다. 참된 영과 거짓된 영을 구별하는 기준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4:1~3).” 사도는 분별할 것을 요구합니다. 분별의 기준은 물론 성경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믿음은 기독교 복음이 가르치는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또 4장 14~15절도 봅시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누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한다면, 그는 참된 신자일 수 없습니다. 교리적 테스트는 가장 기본적인 테스트입니다.
B. 삶?믿는 것에 순종하는가? (1:5?2:6; 2:29?3:10; 3:23?24; 5:4?21)
두 번째로 사도가 제시하는 테스트는 삶의 테스트입니다. 아무리 그가 교리의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따라서 살지 않는다면 그의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에 불과할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그 믿음의 내용을 따라서 사는 ‘순종’의삶을 통해서 그 참됨이 입증됩니다. 즉, 믿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삶 곧 행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2장 3~6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참된 믿음은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의 삶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3장 7~10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 의를 행하고, 마귀의 자녀는 마귀처럼 행동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순종 곧 삶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사도는 분명히 가르칩니다.
C. 형제 사랑?같은 주를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2:7?10; 3:10?24; 4:7?5:3)
제 아무리 교리적으로 옳고 믿는 바에 따라 바르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제시하는 참된 신자의 세 번째 테스트는 같은 주를 섬기고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장 9~10절을 봅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또 4장 7~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진술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명령이기 전에, 진술입니다. 참된 신자는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3. 확신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사도 요한은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내부의 분열 현상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빠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참된 신자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교리와 삶 그리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 테스트를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죽으셨으며 영광의 몸을 입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믿음의 내용에 합당하게 순종하면서 살아가는가? 불이익과 손해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가? 이것이 사도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테스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는가? 말이 아니라, 참으로 적극적으로, 물질로, 행위로 사랑하는가? 내게 호의적인 형제들에게만 한정된 사랑인가,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모든 형제를 향한 사랑인가? 사도가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흔들기 위함이 아니라, 흔들리는 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 확신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요한일서를 상고해갈 때, 주께서 벧샬롬의 모든 지체들로 큰 은혜의 확신에 이르게 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