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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5) - 진리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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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5) - 진리 테스트

요한일서 2:22-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6-05

말씀내용
우리는 지금 사도가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도덕적 테스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그 첫째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2:3~6). 두번째 기준은 사회적 테스트로 형제 사랑이 제시되었습니다(2:7~11). 사도는 세번째로 교리적 테스트를 제시하는데, 그 기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말씀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진리의 부재 현상에 맞물려 비진리, 즉 거짓된 이단과 사이비 사상들이 만연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본문은 매우 적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적그리스도의 본성: 그리스도 부인(22~23)
사도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먼저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사도는 이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돌려서 표현하지 않습니다. 매우 직선적으로 선명하게 참과 거짓을 판단합니다. 사도에게 이것은 돌려서 말할 만큼 한가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22).” 이미 19절에서 적그리스도들이란 교회를 어지럽히고 나간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사도는 이제 더 분명하게 그들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악한 육신을 입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사람이 세례 받을 때 그의 육신에 임하셨다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떠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으심, 그리고 육체로 부활하심을 모두 부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를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아버지도 부인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이 22절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것을 부연합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의 두 본성이 한 인격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했던 기독교 복음이었습니다.

2. 양보 못할 본질적인 참과 거짓의 문제가 있다.
기독교 복음은 이 진리 위에 서 있습니다. 사도는 2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을 머리로 이해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가 20절에서 말한 기름부음은 특별한 신자들이 소유하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부음이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2~14).” 두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말합니다. 그 근본 되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종말과 같은 어떤 주제나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해와 해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성경 구절에 대하여 말할 때, 극단적으로 정죄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 자신의 개인적 감정에 관한 한, 양보하고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는 복음의 본질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로, 적그리스도로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단호한 입장에 서야 하고 그것을 밝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임에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를 쓸 때, 이와 동일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이 문제가 본질적인 참과 거짓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도는 이렇게 단호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기독교의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 교리의 문제에서 조차,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구에 이끌려 사랑이라는 감상주의적 태도로 처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단과 교회들이 집단적으로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더 심각합니다. 사도들이 본질적인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취했던 태도들을 어리석고 비기독교적인 태도로 여기게 만드는 처신들일 뿐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를 부인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는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왜 이렇게 단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고(23), 둘째로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도 없다는 것입니다(25). 이것이 이단적 교리를 믿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맞게 되는 결과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0).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못 믿겠는데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며 영생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15~16,36).” 그리고 주님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은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안전 장치(24,27)
기독교 신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진리의 테스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리가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진리가 거합니까? 24절에 의하면,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진리가 우리 안에 계속해서 거하도록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여러분은 이단과 사이비 같은 거짓된 교리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나서 이제부터는 너희 하기 나름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는 두 가지 안전장치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고(24) 둘째는 ‘기름부음’(27)입니다.

A. 복음의 진리: ‘처음부터 들은 것’(24)
24절은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진리를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던 처음에 들었던 복음의 진리, 메시지 곧 말씀을 가리킵니다. 왜 사도는 이것을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의도적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교리,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갑니까? 그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찾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 우리가 이미 들은 복음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성도가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은혜로 거듭난 성도들은 그 복음을 또 듣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지겹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그들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 사랑의 이야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면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성도는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205장).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 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 듣게 또 들려 주시오
나 항상 듣던 말씀 나 항상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 주시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반응입니다.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처음부터 항상 듣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더 밝히 알아듣도록 또 들려 달라고 외칩니다. 참된 성도들은 복음을 들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그 복음을 들을 때 세상의 헛된 영화에 미혹 당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게 되고, 천국의 빛난 영광이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을 경험합니다. 강단에서 복음이 아닌 것, 세상의 헛된 영광에 대한 것들을 말하고, 이생에서 잘 살고 복 받는 것이 전부인양 말하는 것들을 듣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해야 마땅합니다. 사도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말로 단순히 전통을 강조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아테네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서 누가가 쓰고 있는 것을 흥미롭게 봅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0~21).” 철학을 숭상했던 1세기 아테네 사람들은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이런 철학적 사색의 산물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하신 일에 대한 사도들의 설명에 기반합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이 부족한 것 인양 새로운 것이 덧붙여져야 할 필요가 없는 온전한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바른 교훈은 오래된 복음이고, 사도에게서 들은 복음이며,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말세에 그것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둔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이지요? 시장이 요구하는 것을 주는 선생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며 이런 거짓된 자들이 그런 선생들을 많이 따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장이 요구하는 것을 주는 것, 그것은 시장의 논리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목적을 가진 기업의 논리이며, 개인의 입신양명에 눈이 먼 타락한 정치인들의 양태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길이지, 기독교회가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도가 말씀한 대로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버리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릅니다. 이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정신은 아테네 사람들이 보여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들어보지 못한 것, 새로운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토양에서 오늘날 신천지와 같은 온갖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났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이미 사도들이 스무 세기 전에 성령으로 예언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처음부터 들은 것’ 즉, 온전한 복음의 진리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동사를 잠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동사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구적으로 주소지를 정하고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그저 잠깐 지내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구성, 지속성이 이 단어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정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도는 또 이 단어를 일방적 개념이 아니라 상호적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아버지도 우리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23절에서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아버지가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또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 자신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24).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거한다는 것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머무는(거하는) 것과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처음부터 들은 것’ 복음의 진리는 우리가 거짓된 교리에 미혹 당하여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는 하나의 안전장치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 그것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귀가 가려워서 새로운 것, 허탄한 것들을 들으려고 하는 성향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들이야말로 십중 팔구 미혹함을 당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B. 기름부음(27)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기름부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주에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20절 말씀을 통해 살폈습니다. 기름부음은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선물로 받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20절에서 ‘모든 것을 아느니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아느니라’는 의미라고 했지요? 모든 신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영적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적인 은사들과 관련되기 전에, 먼저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성령님은 홀로 일하시기 보다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기름부음은 영적인 분별을 가져옵니다. 27절은 20절을 좀 더 부연합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봐라.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목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은 교회를 제도화, 화석화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교회, 기름부음을 받은 교회는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이미 사도 자신이 가르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 목사와 교사의 직분도 동일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들입니다(엡 4:11). 27절의 문맥도 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이단과 사이비의 온갖 거짓 교리들로부터 지켜줍니까? 그것은 주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기름부음입니다. 이 기름부음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를 붙잡게 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며, 그 복음의 진리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함으로써 이단과 사이비의 거짓 교훈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이점에서 성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성도는 근본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더해야 하는 추가적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진리에 대한 분별과 확신을 주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27절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온갖 거짓 교훈들로부터 지켜주는 두 번째 안전장치를 주셨고 그것이 바로 기름부음입니다.

C. 진리와 성령
주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기 위해서 주신 두 가지 안전장치는 ‘처음부터 들은 것’ 곧 복음의 진리와 ‘기름부음’ 이것을 우리는 성령을 주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성령입니다. 성도는 회심할 때 이 두 가지 안전 장치를 받습니다. 말씀은 객관적인 안전장치이고 기름부음은 주관적, 경험적인 안전장치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 우리는 사도들이 전했던 그 오래된 복음을 하늘의 교사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배우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신자들을 면제하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 대로 우리는 더욱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교인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는 것은 율법주의 교회들의 특징이다’라고 가르치는 어떤 무식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는데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나 그런 자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도는 두 가지 안전 장치를 가진 자들입니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모든 거짓 교리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 경력이나 이성적 판단력이나 은혜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의 기준으로서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테스트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깨달아 은혜를 받고 확신하게 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모든 참된 성도들 안에 거한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4. 교훈과 적용
말씀을 정리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진리의 테스트는 중요합니다. 그냥 열심히 행하고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신자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자는 진리의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 처음부터 들었던 그 말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근본 진리에 대해서 명확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것이 머릿속 지식이나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관적 확신이 되도록 주께서는 모든 성도에게 기름부음을 주사 그것이 언제나 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주께서 주신 이 두 가지 안전장치가 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온전한 복음의 진리를 들으셨습니까?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여전히 거하고 있습니까? 그 복음의 말씀을 여러분은 옛 것이라고 진부하다고 여기지 않고 여전히 또 들려달라고 말할 만큼 그 복음의 은혜를 주관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기름부음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버지를 소유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십시오(벧후 3:18).”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하고 더 영광스럽고 더 유익하고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너무나 크고 광대하며 영화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드리고 열정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더욱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믿는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안전장치가 풍성하고 견고하게 여러분 안에 자리하게 하십시오.
하지만 이 모든 일에서 아직도 불확실하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 나는 아직 확신이 없고 잘 모르겠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할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은혜를 베푸시는 주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간 사람들 가운데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4절을 따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는 이 말씀이 우리 벧샬롬 교회 공동체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 각자의 심령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