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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2)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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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2)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일서 2:1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5-15

말씀내용
우리가 살피고 있는 요한일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참된 신자들이 확신을 얻고 이로써 성 삼위 하나님 안에서 더불어 누리는 성도의 교제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사도는 입으로는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거짓된 신자들의 경우를 죽 다루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참되나 연약한 신자들도 자신들이 거짓된 신자인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었기에 잠시 멈추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잘못되었거나 여러분의 신앙이 거짓이라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쓴다고 격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난 주에 살핀 2:12~14의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우리가 살필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확신하는 가운데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요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 하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전체 논지에서 보면 2:12~17은 격려와 권면의 차원에서 삽입된 괄호와 같은 기능을 하는 부분입니다.

1.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은 금욕주의나 율법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종종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를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거룩과 세속을 나누는 이원론으로, 기독교인은 세상을 등진 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또 성경은 세상에 대해서 그런 가르침을 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세상에서 도피하라거나 세상을 거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금욕주의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들이 축소해서 이해하듯, 술, 담배와 같은 어떤 특정 행위들을 하지 말라거나 사회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은 술이나 담배와 같은 것으로 축소될 수 없고, 우리가 이 세상의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 명령은 말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의 두 가지 전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A. 세상 사랑과 아버지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15b).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첫번째 전제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어서 신자의 내면에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절 하반절에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씀한 것이 그것입니다.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과도히 사랑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3.9.2).” 주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주님께서는 사랑의 대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원리를 지적하십니다. 두 주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은,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서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의 지배를 받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야고보서도 말씀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할 때, ‘아버지의 사랑’은 문법적으로 보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거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일 수 있는데, 문맥상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이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나 우리의 사랑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대상을 향한 사랑이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좀 더 말합니다. 16절 하반절에, “다 아버지께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그 원천이 아버지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우리는 함께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이 명령의 첫번째 전제입니다.

B. 세상과 그 정욕은 다 지나간다(17a).
이 명령의 두번째 전제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지나갈 것,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 결국 그림자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는 말입니다. 17절에서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신자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유업을 받아 누리게 될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실재를 바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 앞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가변적이고 임시적이고 곧 사라져버리게 될 것들이라고 성경은 일관되게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b~8).” 사도 베드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썼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지나가버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과 가르침에는 두 가지 전제가 깔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3. ‘세상’이 의미하는 것
이제 우리가 본격적으로 생각할 것은 신자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한 말씀을 잘 압니다(요 3:16). 그런데 여기서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신자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성경이 세상이라고 말할 때, 세상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세상이고, 비록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도 타락하였으나 여전히 세상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도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죄인이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고 악의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피조된 물질 세계가 아니라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령 요한복음 1장 10절을 보면 그 구별이 잘 드러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앞에 두 번 등장하는 ‘세상’은 첫번째 의미에서 창조된 세계를 말합니다. 세번째 나오는 ‘세상’ 즉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은 두번째 의미의 세상 즉 사람들입니다. 자, 여기까지 보면 사도 요한이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세상은 첫번째도 두번째 의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첫번째 의미에서의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두번째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가리키는 세번째 의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세속적인 방향을 향하여 가는 체제를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의 시스템, 세상의 가치관, 물질 자체 라기 보다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쾌락, 유흥과 야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고(요 14:30; 16:11),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신’이라고 불렀습니다(고후 4:4). 사도 요한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런 토대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가 사랑하지 말라고 한 세상은 이런 의미의 세상입니다. 마귀의 영향력 아래서 번창하는 악한 체계와 정신과 관습과 그 모든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아버지와 세상을 대립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이원론이라고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원론이 있지만, 이것은 영지주의나 플라톤 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론적, 우주론적 이원론이 아니라, 단지 임시적이고 도덕적인 이원론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이것은 창조된 세상을 의미하거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악한 시스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한된 차원에서 사도가 아버지와 세상을 대립적으로 말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4.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세 가지(16)
사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즉, 타락한 이 세상의 악한 체계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합니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세상이 인간에게 줄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에, 세상의 악한 체계 역시 그 임금인 마귀의 기만을 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A. 육신의 정욕
먼저 육신의 정욕입니다. 여기 사용된 두 단어, 육신과 정욕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단어들입니다. ‘육신’은 바울 서신에서 종종 인간의 죄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들에서는 그런 함축 보다는 인간의 제한된 몸, 영이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 자신을 의미하는 중립적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욕’이라는 단어도 도덕적으로 중립적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을 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여기서 ‘원하고 원하였다’는 말이 이 단어입니다. 문제는 정욕(원함)의 대상이고, 그것이 지나친 욕구와 애착이 될 때 우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육신의 정욕이라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욕망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질을 포함합니다. 로이드존스는 이것을 육신의 필요에 예속되어 사는 것,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도 잘 설명했는데 인용하겠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감각에 지배되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식하며 사치에 빠지고 쾌락의 노예가 되며, 도덕적인 면에서 느슨하고 욕정적이며, 재산 사용에 있어서 이기적이고, 영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되 세상적, 물질적 욕심을 충족시키는데는 열을 올리는 삶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의 계명을 잊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며 거기에 대해 무관심하게 합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아주 추악한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무관심한 삶을 살게 만드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필요만 채우면서 사는 것이지요. 우리의 영적 삶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이 시대에 만연하는 음란한 동영상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죄라고 할 수 없는 사과파이라고 존 파이퍼는 적절하게 지적했습니다. 사과파이가 주는 만족에 이끌려 살게 되는 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B. 안목의 정욕
두번째로 다룰 것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여기서 다시 정욕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정욕은 직역하면 눈들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건 관념적인 것이건 눈으로 보는 것을 도구로 삼아 만족을 추구하려는 욕구에 이끌리는 삶을 지적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눈에 대한 부정적 묘사들, 즉 눈이 어떻게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지를 많이 지적합니다. 아간이 여리고 성의 물건들을 훔쳤을 때, 그는 ‘보고’ 탐을 내어 훔쳤습니다(수 7:21). 다윗도 봄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삼하 11:2). 이런 눈의 위험한 유혹을 알았던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이점에서 세속현자들의 말, ‘견물생심’은 지혜로운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율법을 설명하신 대목이 중요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주님은 보는 것과 간음을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음욕(정욕)을 품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도 우리의 눈을 유혹하는 것들로 가득한 시대입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우리는 보고 보며 또 봅니다. 하루 종일 봅니다. 문제는 무엇을 보는가 입니다. 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고 저것을 소유하게 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모든 생각은 세상과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가 주는 기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다 소유해도 여전히 불행할 것입니다. 그것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것을 더 보고 보지 못하는 것이 여러분의 행복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것은 눈을 관리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느냐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C. 이생의 자랑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사도는 이생의 자랑을 말합니다. 앞의 두 가지가 정욕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도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태도의 문제입니다. 여기 사용된 ‘이생’이라는 헬라말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 또는 소유와 재물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가졌느냐를 자랑하는 문제입니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허탄한 자랑’이라고 못박았습니다(약 4:16). 여기 사용된 ‘자랑’이라는 헬라어 단어 자체가 허탄한 것을 자랑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랑을 로마서 1:30에서 사형으로 정죄 받을 죄로 지적했고, 디모데후서 3:2에서는 사람들이 보여줄 말세의 징조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람이 자랑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이 세상에 한정된 것들, 있다가 없어질 것들을 자랑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 즉 이생의 자랑에 공을 들이는 인생은 영원한 유업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보다 훨씬 더 교묘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이생의 자랑에 뒤덮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출신, 학력, 직업, 교양 수준, 가족, 가문, 자기 노력, 근면, 성공, 명성, 사회적 지위, 영향력, 유명한 지인… 할 것 없이 자기가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랑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주일에 예배에 다녀와서 부부싸움을 하는 부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부인들이 다른 부인들이 들고 온 명품 백을 보고 나도 그걸 사겠다고 싸우는 겁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맞물려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절제해야 하는지 생각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5. 허상 대 실재(17; 고후 4:18)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두번째 전제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라고 말씀합니다. 물질적 소유물들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욕’ 즉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정욕과 세속적인 태도도 다 덧없이 지나가버립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라 허상입니다. 실물이 아니라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지나간다’는 말이 여러분에게는 재앙처럼 들립니까, 아니면 위로가 됩니까? 이것은 신앙을 점검하는 하나의 시금석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허상과 실재 사이를 분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갑니다.

6. 적용과 교훈
오늘 이 말씀을 몇 가지로 적용하여 교훈을 삼도록 하겠습니다.

A.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라!(고전 7:29~31; 약 1:9~10; )
첫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가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고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도가 지금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서만 모든 것의 사용이 정당화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누리도록 허락하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절제 없는 방종으로 가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합당하게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자는 금욕주의와 방종 그 어느 것으로도 치닫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길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누리는 것은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되 그것을 과도히 의지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없어도 그만이다’하는 마음으로, “내게는 하나님이 계시니 만족한다”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세상에 붙잡히지 않고, 세상의 ‘지나가는’ 유한한 것들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서 정욕과 유혹을 경계하여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저는 존 칼빈의 권면으로 여러분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곧 없어질 재물을 너무 탐내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을 너무 믿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혹은 추방으로 혹은 흉작으로 혹은 화재로 혹은 기타 방법으로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으시며 적어도 풍족하지 못한 처지에 있도록 제한하신다. 그들이 마음놓고 결혼생활을 탐닉하지 않도록 주께서는 악한 처나 불량한 자녀나 가족의 죽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며 교만을 꺾으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관대히 다루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허영심으로 부풀고 자신감으로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들에게 병과 재난을 보내어 이 모든 좋은 것은 없어지는 것, 불안정하고 무상한 것임을 눈으로 보게 하신다...... 십자가의 훈련을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깨닫는 때라야 우리는 올바로 전진을 할 수 있다......우선 현세 생활을 철저히 무시하지 않으면 참으로 정신을 차려 내세를 원하며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3.9.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을 주시는데, 그것도 사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요, 세상은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는 말씀도 마음에 새기십시오(약 1:9~10).

B. 영원을 바라보고 살라! (딤후 4:10)
그러므로 신자는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여 거기 목매어 살지 않고 영원한 유업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순종이라는 테스트를 통하여 참된 신자 됨을 드러내는 사람은 영원히 거합니다. 세상과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Charles Dutton(65세)이라는 미국의 흑인 배우가 있습니다. Charles는 젊은 시절 우발적 살인으로 7년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연기를 연습했습니다. 석방된 후,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단역을 맡다가 <피아노 플레이어> 라는 연극에서 대히트를 하게 되면서, 텔레비전과 영화로 진출해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Charles를 인터뷰하던 기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수형생활에서 브로드웨이로 성공적 진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까?” 그의 대답입니다. “난 감옥을 치장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해서 나는 매일 이곳은 잠깐만 있을 곳이라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주곤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언젠가 막이 내려오고 무대 위에서 내가 가지고 살던 모든 것?내 재산이든 내 고통이든?이 다 치워지는 시간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무대를 꾸미는데 목을 메고 사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삶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삶을 사십시오.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고, 사람들이 칭찬해주고, 사람들의 명성에 휘둘리는 삶은 다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맴돌던 그 모든 사람들도 다 지나갑니다.
데마는 어리석은 인생의 전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a).” 어리석은 데마의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영원히 하나님 안에 거하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