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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1) - 신자가 누리는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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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1) - 신자가 누리는 영광

요한일서 2:12-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5-08

말씀내용
1. 자녀들아, 낙심하지 마라!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단지 삶의 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릴 때 신자는 낙심하게 됩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성경적인 대답을 얻지 못할 때, 신자는 낙심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의 위로이고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확신입니다. 낙심하는 신자에게 이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편지를 읽어가던 교인들이 자칫 낙심하게 될 것을 우려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도가 요한일서를 쓰는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신자의 참된 조건은 계명을 지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 나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하고 탄식하거나 “아, 나는 지금 한 형제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므로 구원받은 신자가 아니란 말인가?”하는 생각을 하는 연약한 신자들이 있었을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 요한일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에 이르지는 않으셨나요?

A. 위로와 격려
이런 자리에 있는 신자들에게 사도가 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시처럼 부드럽고, 사도의 사랑 어린 호칭들로 가득합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또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사도가 부르는 이 호칭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곧 살펴보겠지만, 분명한 것은 사도의 사랑이 묻어나고 있는 말들임은 분명합니다. 사도는 바로 앞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그 안에서 행하며 또한 어둠이 그 눈을 멀게 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 편지를 읽게 될 신자들이 “아,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로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연약한 믿음을 의심하게 될까 봐 말합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의심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미 여러분의 곁을 떠나간 그 사람들 특별히 거짓 교사들입니다. 나는 지금 그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만일 범죄하여도, 또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하여도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합니다.

사도는 참된 신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그들을 격려합니다. “어떻게 그 모든 주님의 계명을 다 지키고 형제를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신자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너희가 신자로서 행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참된 신자들 안에 거하시고 성령님께서 그 일을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된 신자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일들을 말한 것입니다.

B. 신자가 누리는 영광을 알라.
위로와 격려를 주면서 사도는 또한 신자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움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사도는 잘 숙련된 목회자 답게 가르칩니다. 더 많은 내용을 말하기 전에, 그들이 신자로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신분과 자리를 먼저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신자에게는 최고의 기쁨이고 감격이기 때문입니다.

2. 자녀(아이), 아비, 청년에 대한 해석
우리가 이 짧은 본문에서 제일 먼저 질문하게 되는 것은, 자녀(아이), 아비, 청년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A. 교회 안의 세 그룹
먼저 이 세 부류가 교회 안의 세 그룹을 각각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중에서도 연령에 따른 세 그룹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아동부, 청년부, 장년부 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 호칭이 세 그룹을 가리키는 것은 맞지만, 그 기준은 나이보다 영적 성숙도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최근에 회심한 사람들은 자녀(아이)이고, 오래 믿어 믿음 안에 굳건히 선 사람들이 아비이며, 청년들은 힘있게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어떤 입장이 사도의 의도였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B. 교회 안의 두 그룹
두번째로는 사도가 교회 안의 두 그룹을 지칭하여 이 호칭들을 사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일단, ‘자녀들아’ 혹은 ‘아이들아’’ 라고 부른 것은, 사도가 교회 전체를 향해서 부를 때 종종 사용하는 호칭이라는 점에서 교회 전체를 부른 것이라고 봅니다. 가령 2:1에서 사도가 “나의 자녀들아” 라고 부른 것은 교회 전체를 향해서 한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사도는 이런 식으로 교회를 부릅니다. 사도 자신의 나이가 거의 90세 정도 되었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사도보다 어렸기에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은 12절에서는 ‘자녀들아’ 라고 했고 14절에서는 ‘아이들아’ 하고 부른 것입니다. 아비나 청년의 경우와 달리 이 경우에만 헬라어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앞에서는 teknia 라는 단어, 뒤에서는 paidia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의 차이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teknia(자녀)는 부모와 자식 관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사용되는 단어라면, paidia(아이)는 선생의 훈육 아래 있는 성년이 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아이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며 두 가지 단어 모두를 사용하셨다는 점을 생각하면(요 13:33; 21:5), 사도 요한이 지금 단어를 바꾸어 사용하였다고 해서 이 단어들의 다른 의미를 의도하였다고 보기 보다 오히려 동의어 반복을 효과적으로 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자녀 혹은 아이를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사도의 호칭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비와 청년은 교회의 두 그룹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단순히 연령에 따른 아비와 청년 두 그룹을 생각할 수 있고 또는 영적 성숙이나 직분에 따른 두 그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직분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아비와 청년을 각기 장로와 집사로 이해할 수 있는데 좀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교인이 다 장로와 집사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의 장년과 청년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늙은이와 젊은이로 분류해서 지칭한다는 점도 이 해석을 지지해줍니다. 사도가 ‘자녀/아이?아비?청년’의 순서로 말하는 점도 사도가 지금 교회 내의 세 그룹을 지칭하기 보다는 두 그룹을 지칭한다는 견해를 더 그럴 듯하게 만들어줍니다.

C. 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위로다.
이런 견해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가 매우 강력하게 참된 신자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들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말씀하는 것 모두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어린 아이들처럼 결백하고, 청년들처럼 힘있게 영적 전투를 싸우며, 영적 경험과 성숙함에 있어서 아비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그룹이든 두 그룹이든 이 모든 경우의 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3. 사도가 말씀을 반복하는 의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일단,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쓴다’는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사도가 이 서신에서 많이 사용하는 스타일입니다. 1:4에서 사도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이라고 했고 2:1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이라고 했습니다. 또 2:7~8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도는 어떤 중요한 진술을 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특이한 점은 사도가 동일 혹은 유사한 내용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세한 차이도 보입니다. 처음 세 번은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이라고 표현했고 두번째 세 번은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이라고 과거(부정)형태로 썼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추측에 의존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추측에 의존하지 않는 가장 가능한 설명은 여기 사용된 헬라어의 부정과거시제가 서간문에서 종종 사용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서 현재시제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면서 어떤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현재시제로 설명한 정통적 신앙의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라기 보다 좀 더 깊이 있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부정과거시제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4. 신자가 누리는 영광
이제 우리는 사도가 말씀하는 내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녀들/아이들 그리고 아비들, 그 다음에 청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A. 자녀들아(12)/아이들아(14)
각각 읽어보지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12).”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14a).”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는 ‘죄사함을 받은 지식’과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면서 보충적인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얻게 되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복음을 듣고 회심할 때에 경험하는 가장 근본적인 앎입니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아버지가 되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 없이 경외하는 심정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자녀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들이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고, 이들이 이미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자기들이 죄가 없다고 주장했고(1:8) 또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했습니다(2:4). 그들의 말은 거짓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압니다. 지금 자기가 편지를 쓰는 대상인 이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신자들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부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의심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도는 특별히 영적으로 어린 신자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온 교회를 향한 사도의 메시지라고 받아도 무방합니다.

B. 아비들아(13a,14b)
두 번째로 아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13a).”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14b).” 이 경우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성부 하나님입니까, 성자 하나님입니까? 물론 모두 다 해당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1이나 요한일서 1:1에서 ‘태초’라는 말을 성자이신 주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여기서도 사도가 가리키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게다가 14절에서 “아이들아”라고 하면서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다”고 한 것을 보면, 단순한 반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태초부터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으므로,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알았음이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영지주의 이단들이 강조하는 바,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식한 표현입니다. 사도는 그들과 같이 우리가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지식이 거짓된 지식이며, 참된 신자의 믿음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을 포함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강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지식이 점점 더 깊고 분명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을 아는 지식이 없이 믿음은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참된 신자의 시금석입니다. 이 지식은 단지 이론이거나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지식이고 경험적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이야말로 성숙한 아비와 같은 자들의 신앙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독자들이 이미 태초부터 계신 주,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편지를 그들에게 쓰고 있노라고 말함으로써, 이들 안에 있는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고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C. 청년들아(13b, 14c)
끝으로 청년들에게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3b).”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4c).” 여기서 ‘악한 자’, ‘흉악한 자’가 사탄을 가리킨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가 영적으로 어떤 단계에 있든지 참된 신자라면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청년들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악한 자와 싸워 이기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당연히 영지주의라는 싹을 틔우고 있던 이단적 가르침, 거짓된 진리와의 싸움을 의식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 이어서 사도가 권면 하려는 바, 세속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싸움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청년들이 악한 자/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는데, 언제 이겼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가 참된 신자의 모습으로 소개하는 말들에서 모든 동사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2절에서 ‘사함을 받았다’ 13절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절에서 ‘알았음이요(2회)’, ‘이기었음이라’가 모두 완료형시제로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어떤 행동 또는 사건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행동 혹은 사건이 다 언제 일어났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을 때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골로새서 2:15을 보지요.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었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승리를 계속 누리는 삶입니다. 이 승리가 모든 신자의 삶 속에서 영향력 있게 실현되고 경험됩니다. 그것을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어떻게 승리했다는 것입니까? 신자가 승리할 수 있는 두 가지 근거를 말합니다. 먼저 신자가 강하기 때문인데, 신자가 강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싸움을 싸우시고 승리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신자 안에 말씀이 거하실 때, 이런 승리가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악한 자와 싸울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말씀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 함은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쓰면서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사탄과 더불어 싸워 이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너희는 강하고 너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를 너희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쓰는 것이다.”

5. 교훈과 적용
사도는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을 분별하고 자신들의 믿음의 참됨을 알고 확신에 이르게 함으로써, 성도들 안의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참된 믿음의 특성을 말하고 거짓을 분별하는 일을 엄밀하게 하려다 보니, 참된 신자들 중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사도는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독자들을 향해서 ‘자녀(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사랑 어린 음성으로 부르면서 그들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확인해줌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상고한 본문 말씀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어떤 것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일어난 구원의 사건과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을 이긴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신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싸움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사도는 참된 신자의 증거로, 죄사함을 받음, 하나님(그리스도)을 아는 지식, 악에 대한 승리를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그리스도 안에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은혜이며 신자들이 누리게 되는 영광입니다. 신자들이 누리는 영광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것이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주의 자녀들에게 이미 주어진 은혜요, 축복이며 영광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영광을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신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움,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서 거듭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에게 주어진 이 영광을 알라고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이것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신자가 누리는 영광스러움이 이제 사도가 신자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모든 요구의 토대가 된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 영광을 알 때, 신자는 죄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계명을 지키라는 명령을,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감사함으로 받고 기쁨으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1세기의 성도들을 위로하셨듯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를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