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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0) - 사랑이라는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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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10) - 사랑이라는 테스트

요한일서 2:7-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5-01

말씀내용
1.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요한일서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으니(1:5),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이고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며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자백함으로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1:5~2:2).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 다음에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2:3~6). 이것이 지난 주일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세번째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10절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라고 말씀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참된 그리스도인을 식별하는 테스트로 제시한 사도는 이제 그 계명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다룰 한 가지 중요한 계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5절에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지니라”고 했는데 여기 ‘산다’는 말의 본뜻은 ‘거한다’, ‘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40번 그리고 요한서신에서 27번 사용되었는데, 사도 요한에게 이 단어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거한다는 것은 영구적으로 깊이 연합된 삶을 의미하는 말이고 6절에서처럼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형제 사랑을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2. 옛 계명 = 새 계명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도가 논지를 전환하거나 주의를 집중시킬 때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이제 계명 중에서도 하나의 계명, 곧 사랑의 계명을 다루려고 하기에 독자들의 주의를 모으는 사랑 어린 부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는 약간 모순적으로 들리는 말을 꺼냅니다.

A. 새 계명인가, 옛 계명인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계명이 사랑의 계명을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마는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지금 새 계명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옛 계명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새 계명은 무엇이고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이 편지를 읽게 될 독자들이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그들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계명을 말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뿐 아니라 구약은 분명히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통해서 율법이 사랑의 계명 임을 보여줍니다. 두 구절을 각각 보지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주님께서도 이 말씀들을 가지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39).” 이점에서 보면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
또 사도는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던 바로 그 처음부터 그들이 복음과 함께 들었던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 마지막 밤에 주님에게서 들었던 새 계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이 주님으로부터 이 새 계명을 들은 지도 약 50년이 지났습니다. 이점에서도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옛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도는 이어서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좀 전에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율법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고 이들이 처음에 복음을 들을 때부터 들어서 배웠던 옛 계명 임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또한 새 계명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님께서는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물어야 합니다.

C. 왜 새 계명인가?
주님께서 새 계명을 준다고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율법의 핵심인 이 계명을 온전히 실현하심으로써 사랑하라는 이 계명의 전혀 새로운 차원을 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또한 십자가에 당신을 못박는 로마 군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셨고 죄인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보내실 성령님을 통하여 영생을 주심으로써 신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행하고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제자들은 주님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9절에서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 안에서도 사랑은 참된 것이 될 것입니다. ‘참되다’는 말은 ‘실재가 되다,’ ‘온전케 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이 세상이 아닌 교회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새’ 계명이라고 말할 때, ‘새로운’을 뜻하는 형용사 ‘카이노스’(kainos)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새로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있던 것이 성질상 혹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되었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되다’는 말씀은, 이제 새 계명이 말씀하는 바, 진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했고 신자들 안에서도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D.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춘다.
사도는 참빛이 벌써 빛을 비추었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참빛이 세상에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참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다 지나갔다거나 언젠가 물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이미 물러가기 시작했고 물러가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은 빛 가운데 거하는 신자들 안에서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3. 형제 사랑으로 시험되는 신앙
이제 9~11절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사람의 신앙은 말이 아니라 형제 사랑이라는 테스트를 통해서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A. 형제를 미워함으로써 어둠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
“나는 빛 가운데 거하여 살고 있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여기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어느 순간, 또는 어느 기간 어떤 형제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씀하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는데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미움이 그가 살아가는 기조이고, 형제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형제를 미워함으로써 자기 말처럼 빛 가운데 있는 자가 아니라 어둠에 있는 자임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11절에서 계속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단지 어둠에 있을 뿐 아니라 어둠에 행하는 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이 사람의 영적 주소가 어둠이라는 말이고, 이 사람의 영적 활동 영역이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뿐 아닙니다. 그는 갈 곳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는 삶을 지배하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신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그 인생에 하나님이 없는 불신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신자는 자기가 가야할 인생의 종착지를 압니다. 신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자를 지배하는 삶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비극은 갈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둠에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어둠에 행하기 때문에 갈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비참한 말이 뒤에 나옵니다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무서운 말입니다. 어둠에 있고 어둠에 행할 뿐 아니라,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불순종은 결정적으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여 지속적인 불순종과 지속적인 미워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은 시각을 왜곡시키고 눈을 멀게 하여 참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삶 속으로 그를 던져 넣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쓰여지던 1세기 말, 야만인들은 자기들의 적들의 눈알을 뽑아 눈을 멀게 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을 가장 치욕스럽게 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서신을 읽던 1세기의 독자들에게 ‘눈을 멀게 한다’는 말은 매우 실제적인 말이었습니다. 어둠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가 사용하는 어둠은 영적 실재입니다. 그리고 눈을 멀게 할 만큼 공격적입니다. 어둠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인생을 점점 더 혼돈과 무질서 속으로 데려갑니다. 어둠의 영역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점점 더 자신의 죄를 발견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어둠에 있고 어둠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일이고 성경은 그것을 경고합니다. 눈이 먼 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어둠 가운데서 형제를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자기 기만입니다.

B.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빛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
그러나 사도는 반대의 경우를 10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입니다. 형제 사랑이 그가 어디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도는 한 마디를 더 붙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거리낌’(skandalon, 추문을 의미하는 영어 scandal의 어원)이라는 말은 ‘덫,’ ‘미끼를 달고 있는 막대기’ 혹은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돌부리/원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대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마 18:7; 눅 17:1; 갈 5:11; 마 16:23; 롬 16:17; 고전 1:23).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여기서 거리낌(걸려 넘어지게 하는)의 대상이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문맥상, 이 구절에서 거리낌의 대상은 그 사람 자신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형제를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자신을 넘어지게 하는 요소를 가지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빛 가운데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할수록 그는 믿음의 공동체에 더 깊이 결속하게 되고, 이 결속은 점점 더 그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형제 사랑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4. 교훈과 적용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적용적으로 생각하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A.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형제 사랑은 단지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말에 있지 않듯이, 느낌에 있지도 않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드러난다고 앞에서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계명,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느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행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계명입니다. 명령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선택 사항이거나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증명입니다. 형제 사랑은 내가 어둠 가운데 있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고 있으며 빛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방식입니다. 형제 사랑은 단지 최소한의 선만 넘기겠다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의 논지는 거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서로와 세상에게 알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모든 사람이 형제 사랑으로써 교회를 교회로, 신자를 신자로 알아볼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음으로써,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배움으로써, 가만히 앉아서 기도함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느낌이 아니고, 내가 내 스타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내어주는 것이고, 내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고, 내가 형제를 섬기기 위해서 손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형제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그리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형제 사랑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게 형제 사랑이라는 관문을 지나 빛 가운데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손해와 불이익과 불편함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형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고 계십니까?

B. 미움은 덫이다.
또 하나의 부정적 차원의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움을 사소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1~22).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의 뒤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요일 3:15). 이 말씀의 빛에서 볼 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도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11).” 미움은 어둠에 살고 있음을 증명할 뿐 아니라 눈을 멀게 하여 점점 더 우리의 삶을 피폐하고 비참하게 만들어갑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한 말씀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거리낌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넘어지게 만드는 거리낌 때문에 이 사람은 어디서도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즉,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넘어지게 하고 여러분의 눈을 점점 멀게 하고 갈 곳을 알지 못하게 하는 덫이고 거리낌입니다.

C. 형제 사랑은 성숙한 신자만의 특징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얻는 교훈은, 형제 사랑은 성숙한 신자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모든 참된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가 영적으로 어리든지 성숙하든지 신자라면, 그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가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신자들의 몫이라는 인상을 받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 사랑은 신앙이 성장하는 어느 단계부터 행하는 덕목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을 듣던 처음 순간부터 우리가 듣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듣고 배우고 순종해야 할 계명으로 가진 것이 형제 사랑이라는 새 계명입니다. 이점에서 저도 여러분에게 옛 계명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참으로 빛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형제 사랑이라는 이 계명을 온전히 실현하고 성취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만이 아니라 믿는 우리에게도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모든 주의 자녀들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형제 사랑, 자기를 주는 사랑은 결코 가끔 한 번씩 하면 되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양식이고 습관이고 태도이며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안에 거리낌이 없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은 안전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형제 사랑 안에서 우리 걸음을 안전히 인도하시고 교회를 풍성하게 하시며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을 알게 하시는 복된 은혜를 더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