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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9) - 순종이라는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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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9) - 순종이라는 테스트

요한일서 2: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4-24

말씀내용
1. 확신의 중요성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뭐 하나 분명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통 일은 아닐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불안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 중 어느 곳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확신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브레이크를 잡고 운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확신은 쉽게 말해서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기업의 영광을 받게 된 존재임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힘있게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확신은 중요합니다. 사도는 당시의 이단적 가르침 그리고 교회로부터 분리해나간 사람들로 말미암아 확신이 흔들리고 있던 참된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려고 이 서신을 썼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3).”확신이 이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거짓된 확신의 증거들도 많았습니다. 신앙 체험이나 느낌, 감각이나 환상 또는 특별한 기도 응답 등을 우리는 참된 신앙과 확신의 증거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확신을 주려고 쓴 이 서신에서 밝히고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과는 아주 다른 요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도가 쓰고 있는 문장 구조들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하는 말은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사람들(1:6),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1:8), 또 자기들은 범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1:10)의 주장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런 방식의 문장 구조를 사용합니다. 먼저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2:4), 하나님 안에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2:6) 그리고 자기는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2:9)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들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신앙을 시험해 보겠다는 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참됨과 거짓됨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자기 신앙도 제대로 분별력있게 세워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앞단락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범죄하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말했다면, 이제 사도는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분별할 수 있는 긍정적인 테스트들을 제시합니다. 이 테스트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발견되는 바, 첫째는 도덕적 테스트로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가 하는 순종 테스트이고(“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4절), 둘째는 사회적 테스트로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새계명을 따라 형제들을 사랑하는가를 묻는 사랑 테스트(“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9절)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교리적 테스트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리적 토대를 묻는 테스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부적절한 입장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처음으로 다루고 싶어하는 것은 순종 테스트입니다. 당시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집단적 분리 현상으로 큰 상처를 입는 와중이었습니다(2:19). 교회로부터 분리해서 나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이란 것이 그 사람의 입술의 고백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가? 고백의 참됨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어떤 증거를 요구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 자신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당시 교회가 가진 문제들이었고 사도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2. 순종이 중요한 이유
제일 먼저, 사도가 제시하는 참된 신앙의 증거는 순종입니다. 순종은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보여주고(3절) 우리 고백의 정통성을 보여주며(5절) 우리 사랑의 성숙을 증거하고(6절) 그리스도를 닮은 삶의 성숙을 입증합니다(6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요점입니다. 즉, 순종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2세기로 넘어가면서 영지주의라는 종교로 체계화되게 될 가르침이 당시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했고 그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행하는 일들은 아무래도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가르침이 율법(도덕률)폐기론으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서신을 쓸 때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단어 선택에도 매우 신중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요한일서에는 ‘알다’를 의미하는 ginoskein 이라는 단어를 25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외에도 ‘알다’를 의미하는 Oidamen이라는 단어까지 합하면 이 짧은 서신 안에서 사도는 무려 40회나 ‘알다’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가 강조하던 단어가 바로 ‘안다’는 의미의 ‘ginosken 의 명사형인 ‘gnosis’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도가 직접적으로 명사형인 ‘기노시스’를 사용함으로 야기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고는 있지만, 사도는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지식’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안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에서 사도는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순종이 참된 앎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즉 순종이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습니다. 애드리안 라저스(Adrian Roger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알려면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려면 성경에 순종하십시오.(Study the Bible to know about God. Obey the Bible to really know God.)” 디트리히 본회퍼도 같은 취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Only he who believes is obedient; only he who is obedient believes.)”

3. 그리스도인의 정의
이런 방식으로 사도가 지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3절). 그런데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5절).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곧 하나님 안에 사는 자이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는 사람입니다(6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순종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키스트매커(Kistemaker)가 “하나님과의 사귐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동전의 양면(Fellowship with God and knowledge of God are the two sides of the same coin)”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또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9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그리고 자연스럽게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이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거의 잊혀져버린 주제입니다. 잊혀졌을 뿐 아니라 모호한 주제가 되었으며, 거의 의식적으로 다루지 않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 또는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야말로, 사도가 특별히 이 서신을 통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길로 오늘날의 교회가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살아가는 시대의 교회를 향한 불편한 진실입니다.

4. ‘안다’는 말의 의미
사도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즉,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암시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고, 많은 경우, 기도를 통해서 깊이 경험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정말 안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순종할 것이라는 게 사도가 주장하는 논리입니다.

‘안다’는 표현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3절에 사용된 시제입니다.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썼을 때,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에서 안다는 동사는 완료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제를 통해서 암시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한 순간 깨닫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까지 계속해서 그 앎의 영향과 결과를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깨달았던 한 순간의 경험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 지존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앞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3절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할 때, ‘지킨다’는 현재 시제로 사용된 단어가 한 때 지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지키고 살아가는 순종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반면, 4절에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서 ‘지키지 않는’도 현재시제로서 계속해서 지키지 않는 행위를 지속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불순종의 삶을 산다면, 그가 아무리 자신을 신자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불신자의 특징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신자의 특징은 지속적인 순종의 삶입니다.

5. 신앙고백은 순종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결국 사도가 여기서 전개하는 논지는 말로 하는 신앙고백은 순종의 삶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검증을 전혀 하지 않게 된 오늘날의 기독교는 사실상 그로써 타락상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문제를 신앙의 진위를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로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신자가 순종에 있어서 완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특별히 1:9~2:2에서 언급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죄를 지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대언자가 계심을 알고 자백함으로 나아가라는 권고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완전한 순종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사도는 신자가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에 대한 신중함, 주의깊게 순종하려는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게 바라는 바라는 사실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뜨거운 마음’으로 입증됩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욕구가 있는가 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를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순종이라는 주제를 다루며서, 사도는 외적인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태도까지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에서 목회를 감당해야 하는 디도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 1:16).”

단순히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그리고 단순히 말하는 것과 참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점에서 종교적 체험도 검증되어야 합니다. 4절에서 “그를 아노라”고 말한다는 것은 단지 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 영적 체험을 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 고백의 내용이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모순이 될 때, 그 고백은 거짓말이라고 사도는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6. 순종과 확신의 관계: 순종은 확신에 이르는 대로다.
여기서 우리는 순종과 확신의 관계를 정리하는게 좋겠습니다. 보통, 신자의 삶에서 그의 순종이 온전해지게 되면 확신도 더해지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순종하게 될 때, 그는 이 순종이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자신의 속에서 마음을 주어 행하게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단지 지옥 갈 것이 두려워서 혹은 마음 없이 두려움 때문에 한 순종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압니다. 하지만, 반대로 순종에서 멀어질수록 그리스도인의 확신도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의 아름다운 구절들이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시 119:127),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 119:174).” 이뿐 아니라 주님 자신의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순종은 확신에 이르는 주요 대로다.”순종은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거나 수단이 아닙니다. 순종은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결과요, 열매입니다. 사도는 순종하여 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7.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는 순종
우리는 5절에서 조금은 특이한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요한일서에 세 번 나오는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4:9의 의미와 같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두번째는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사랑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5:3의 용례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마지막으로 또 하나 가능한 해석은,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동질의 사랑을 형제들을 향하여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3:17의 용례와 같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하지만 이 문맥을 살필 때, 두번째 해석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증거로 순종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라고 말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감상주의적 언어나 신비주의적 체험이 아니라 도덕적 순종으로 표현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요 14:15,21,23; 15:10). 사랑의 증거는 말이나 신비주의적 체험에 있지 않고 삶에서 드러나는 충성심에 있는 것이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순종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었나니”라고 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물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종료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속되는 온전함의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4:12, 17~18; 요 4:34; 5:36; 17:4; 19:30).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보겠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할 때, 그 사랑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 외에도 요한일서 4:12과 17~18절에서 도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랑의 성숙함을 드러내는 표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성숙한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8. 하나님 안에 사는 자
이제 순종이라는 테스트에 대해서 말씀하는 작은 단락의 소결론이 나옵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의 안에 산다’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라기 보다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압니까? 이것은 확신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대로 행함으로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것, 순종하는 것이 주님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33년의 삶에서 주님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능동적 순종을 보여주셨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때 수동적 순종으로 그것을 다 짊어지고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순종을 드러내는 것이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렇게 긴 인생 여정 동안에 순종함으로써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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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교훈과 적용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교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A. 신앙은 지식 추구가 아니다.
먼저 신앙은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영지주의적 가르침은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신앙이었고 도덕적 삶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과 육을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했고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이해했기에 그들에게 도덕적 삶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지식이었고 그들에게 구원은 죄로부터의 건짐이 아니라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이런 형태로 간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위험을 인식해야 합니다. 신앙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B. 신앙은 사귐이다.
신앙이 지식을 추구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신앙의 본질이 사귐,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7:3에서 영생을 하나님을 향한 참된 관계적 앎 즉 사귐이라고 묘사하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인격적 관계이고 사귐입니다.

C. 순종과 순종하라는 요구
만의 하나,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순종의 요소, 그리고 순종하라는 성경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깊이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혹시 순종을 무시하고 오지는 않았습니까? 순종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병든 신앙, 교만하여 자신을 증명하는 자리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성취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이 아니라 순종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