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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7)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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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7)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1:10-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4-10

말씀내용
교회를 넘어뜨리는 사탄의 전략은 언제나 거짓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뱀을 통해서 하와에게 찾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사탄의 전략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은 언제가 무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할 때, 교인들이 진리의 지식에서 모호함에 머무를 때 교회는 가장 위험합니다. 이점에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침은 사라져가고 프로그램은 늘어갑니다. 온갖 이단 사이비 가르침들이 교회의 안팎으로 난무합니다. 사탄이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1세기 말의 교회가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사도 요한에게 영감을 주어 요한일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1세기 소아시아 교회들의 상황과 우리가 사는 21세기 한국교회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이 서신을 살펴야 합니다.
1. 죄를 짓지 않는다는 거짓 주장(1:10)
사도는 이미 죄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거짓 주장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이 첫 번째 거짓말이고(6), 자기들에게는 죄의 본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8). 이제 세 번째로 사도가 다루는 거짓말은 자신들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10). 죄의 본성이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짓지도 않는다는 주장은 회개와 용서받을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은 나름 논리가 있습니다. 8절에서는 죄의 뿌리인 본성이 없다고 말했다면, 죄의 본성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주장들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거짓 주장들을 어떻게 진리로 논박할 수 있는가 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이런 류의 거짓 주장들을 진리로 물리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배우고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도는 단번에 이 거짓말을 논박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 주장을 통해서 두 가지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입증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A.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듦
죄를 짓지 않는다는 주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용서해주시는 본성 모두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가 아직 죄의 몸(롬 6:6) 곧 죽을 몸(롬 6:12)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속량(롬 8:23)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여전히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여전히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진리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B. 그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음
둘째로 이런 거짓 주장으로써 그들은 자기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그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뒤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5:12).” 즉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요, 영생이 없는 자들입니다.
2. 신자의 균형: 죄를 허용함과 죄를 인정하지 않음 사이에서(2:1)
사도는 여기서 아주 친근하게 독자들을 부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지금까지 사도는 1인칭 복수로 말해왔는데 여기서 돌연 1인칭 단수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는 다시 ‘우리’의 형태로 돌아갑니다. 사도가 이렇게 1인칭 단수로 말하는 것은 직접적인 명령이나 간곡한 권면을 할 때 하는 방식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다른 사도들과 자신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받은 독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리’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도는 자신과 독자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사랑과 친밀함을 강조하는 말로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라고 한 표현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여기만 나타나는 친밀한 표현입니다.
사도는 지금 말하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려고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는 지금 그들에게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죄를 조장하거나 부추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삐딱하게 듣는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신자도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죄를 지을 때마다 자백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신다고요? 그것 참 쉽군요!”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도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거짓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 너무나 엄격한 나머지, 죄를 짓고 넘어지는 형제를 향해 엄격한 기준의 회개와 거의 주어지지 않는 죄 용서를 말하려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관련해서 이런 양극단을 피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균형을 잃어버린 나머지, 죄에 대한 이런 양극단에 서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죄를 쉽게 허용하지 않으면서도?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동시에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사 1:18). 사도가 지금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균형 있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서신의 독자들을 향해 “나의 자녀들아”라고 친밀하게 부름으로써 그들의 주의를 모으고 나서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사도의 의도였습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존재이지만 죄와 싸우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신자도 죄를 짓는다: “누가 죄를 범하여도(2:1)”
사도는 이어 “누가 죄를 범하여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범하여도’의 헬라어 시제는 신자가 죄 가운데 머물러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가 실제로 어떤 죄가 되는 행위를 한다(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신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은 참된 연약한 신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양심을 속이는 대신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고 때로는 심하게 버려졌다는 인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이런 사랑하는 영적 자녀들에게 신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을 근거가 있습니까?
4.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2:1~2)
신자에게는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대언자’라는 말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이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5회 사용되었고 모두 요한에 의해서 사용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 4번, 여기서 1번 사용된 것이 전부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4번 모두 ‘보혜사’로 번역이 되었고(개역개정역) 모두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대언자로 번역되었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옆에 있도록 도움을 요청 받은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개념으로는 변호사 같은 전문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요청을 받아 그 옆에 서서 법적 전문성을 가지고 그를 대변하여 도와줍니다. 성령님이 그런 분이라고 주 예수님은 소개해주셨는데, 이제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어떻게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보혜사(대언자)로서 늘 하나님을 대면하여 넘어지고 실패하는 우리를 변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5. 죄인의 딜레마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죄인은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공의로운 판단만을 기다릴 뿐이고, 그 판단은 당연히 우리 삶에서 평생 지은 죄에 대한 가장 의로운 판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구무언이고 가슴만 칠 뿐입니다. 이토록 의롭고 거룩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진작 알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소용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말해줄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문제는 대언자의 자격, 그리고 능력입니다.
A.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2:1)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 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왜 사도는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쓰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물론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완전한 대언자가 되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비가 아니라 의로움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순종으로 완벽하게 성취하셨고 율법의 의를 완벽히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의로움을 토대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의로움의 토대 위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사귐을 갖는 모든 자녀들에게 그 의를 거저 주실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고 요구할 수 없는 이 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시다’고 표현하는 대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어떤 무지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원하시지 않고 형벌만 주기를 원하시는데 사랑 많으신 주 예수님께서 용서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요 3:16). 다만 그 하나님께서 동시에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성품을 가지셨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B. 화목제물(2:2)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또 하나의 확실하고 보장된 조건을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이라고 쓰인 단어 hilasmos는 (헬라어) 신약 성경 전체에서 요한일서에만 단 2회 사용되었습니다. 또 한 곳은 4장 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어떤 분은 로마서 3장 25절에서도 화목제물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말씀하시겠지만, 헬라어로는 어근이 같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화목제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속죄라는 의미에 하나님의 진노를 푼다는 개념이 더해진 단어입니다. 단순히 죄의 대가를 치르는 속죄를 넘어 하나님의 진노를 푼다는 개념은 고대 이교적 관습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가령,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장자와 같이 지나친 제물을 바치거나 하는 행위들입니다. 이런 개념이 워낙 부정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푸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대단한 제물을 요구하신다는 개념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일단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푼다는 개념의 화목제물을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북해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논지를 그들은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죄에 대하여 만들어내는 너무나 당연하고 정직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거룩하실 수 없으시겠지요.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는 선하고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이교도들이 달래주려고 했던 신들과 성경의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화목제물을 누가 제공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화목제물은 죄인이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해주신 제물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자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 스스로 화목제물을 제공하는 신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친히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기에 가장 합당한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과 죽음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다 성취하시고 우리 죄를 향한 심판자 성부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풀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되시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셨다고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실로 넘어지고 범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요, 기쁨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말씀하시는 대언자는 완전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호레이셔스 보나르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살지 않은 삶 위에 / 내가 죽지 않은 죽음 위에
다른 이의 삶, 다른 이의 죽음 위에 / 내 모든 영원을 의지하네
6.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2:2)!
사도가 말씀하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이것은 이 땅을 살면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죄를 짓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위로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완벽한 대언자가 되신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격려입니까? 여기 어거스트 탚레이디의 찬송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두번 요구하지 않으시리니 / 피흘리시는 보증의 손에서 받으신 값을
나의 손에서 다시 찾지 아니하시리로다 / 완전한 속죄를 주께서 다 이루셨도다
주의 백성이 빚진 모든 것 /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으셨나이다
내 영혼아 안식하라 /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의 공로가
화평과 자유를 말씀하시노라 /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혈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내어쫓길 것을 두려워 말라 /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니라
이분이 우리의 영원한 대언자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이분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대언자가 되사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의로움을 주장하십니다. 참되고 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모든 자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죄 없다고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넘어지고 범죄하는 저는 죄인입니다. 긍휼히 여기시옵소서”라고 은혜를 구하는 모든 주의 자녀들에게는 대언자가 있습니다. 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고 위로를 얻으며 만족하고 이 화목제물을 우리를 사랑하사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존귀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보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