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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6) - 죄와 싸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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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6) - 죄와 싸우는 삶

요한일서 1:8-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4-03

말씀내용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장애물인지를 밝힘으로써 참된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머물 뿐 아니라 자신과도 영적 사귐을 가짐으로써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죄가 하나님과의 사귐의 장애물임을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6~7). 이제 8~9절에서 사도는 죄와 관련한 두 번째 그릇된 주장, 즉 ‘우리는 죄가 없다’는 주장을 다룹니다.

1. ‘죄가 없다고?’
먼저 여기서 ‘죄가 없다’는 주장이 무슨 의미인지, 어떤 배경에서 나온 말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죄가 없다는 말은 죄의 성향, 죄의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여기 ‘죄’라는 단어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이 단어가 어떤 죄의 행동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본성, 성향, 죄의 원리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들 안에서는 죄가 뿌리째 뽑혀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안에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육체 안에서 짓는 죄는 결코 영혼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완전한 이원론이 그들의 기본 논리였습니다.

A.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죄가 없어야 한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한 배경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죄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옳습니까, 틀립니까? 성경의 진리에 부합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의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 구절 하나만 보더라도 위의 말은 맞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거룩함이 어떻게 얻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신자가 ‘우리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죄의 뿌리가 다 뽑혀서 거룩해지는 일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성화가 죽는 날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며, 죽을 때 우리의 성화가 완성된다는 가르칩니다. 성도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성과 싸우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사는 동안에 자신의 행위로써 완전함과 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고, 또 어떤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성에서 자유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B.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사람이다(고전 1:2; 6:11; 1:30; 롬 5:1~2).
지금 우리는 ‘성화’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화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가 점진적으로 거룩함을 입어 변화하는 평생의 과정이라고 보통 이해합니다.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점에서 단회적으로 선언되는 칭의와는 구별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일반적으로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화에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주어지는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점진적 성화이고 또 하나는 결정적/확정적(definitive) 성화라 부릅니다. 결정적 성화는 가령,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고전 1:2)” 교회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고전 6:11). 신자는 이미 거룩하게 된 자로 간주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의로움만 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함도 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물론, 우리는 성화의 결정적/확정적 차원을 말하지 않고 칭의만을 말함으로써도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가령, 이 구절 하나만 가지고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명제,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죄가 없어야 한다는 말에 ‘거룩함’의 요소를 굳이 명시하기 위해서 결정적/확정적 성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즉, 신자는 누구냐? 신자는 어떻게 거룩함을 입은 존재가 되는가?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움뿐 아니라 거룩함을 토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미 의롭고 거룩한 존재로 간주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거룩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에게서 죄의 뿌리가 다 뽑혀서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입니다.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신자는 일평생 성령의 역사로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2. 거짓된 주장이 입증하는 것
‘우리는 죄가 없다’고 이 거짓된 주장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들은 결국 두 가지 사실을 입증하는 셈입니다. 첫째는 자기 기만이고 둘째는 진리가 그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A. 자기 기만
6절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는데, 이 거짓말은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8절 하반절에서 ‘스스로 속이고’라고 말한 것은 자기 기만 즉 자신을 속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억지로 사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19세기의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에 얽힌 일화가 전해집니다. 한 번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을 집으로 청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자, 스펄전은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자기 물컵에 있는 물을 그 사람의 얼굴을 향해서 확 부었습니다. 그 사람이 벌컥 화를 내면서 스펄전의 무례함에 대해서 비난을 하자, 스펄전이 말했답니다. “아, 당신이 보시다시피, 당신 속에 있는 옛 본성이 아직 죽지 않았군요. 그저 기절했다가 겨우 물 한 잔을 맞고 되살아났으니 말입니다.” 사실상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B. 진리가 그 속에 없다.
두 번째로 ‘우리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으로써, 자신들 안에 복음의 진리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진리가 없다’고 말씀함으로써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 준 그 복음의 진리, 1절에서 말한 ‘생명의 말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는 표현은 매우 강력하고도 도발적인 표현입니다. 즉, 그런 거짓된 주장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없는 자들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단정적인 말입니다. 즉, 사도 요한은 진리가 가진 도덕적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가진 자들은 결코 그런 자기 기만의 자리로 가거나 어둠 가운데 행하는 도덕적 해이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논리로 자기들을 정당화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3. 하나님과의 사귐을 향한 열린 문: ‘자백함’(9)
9절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서 ‘우리가 죄가 없다’는 식의 거짓된 주장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 죄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사귐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할 수 있는 열린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에서 ‘죄’는 엄밀히 말하면 복수로 사용된 것으로 ‘죄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죄의 성향, 죄의 본성을 가리키지 않고, 죄의 뿌리/본성으로부터 흘러나온 구체적이고 특정한 죄의 생각들과 행동들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을 자백하라는 것입니다. 죄들을 자백하려면, 그 죄들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가 인식할 수 있는 죄들은 결코 하나님과의 사귐을 막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자기가 인식하는 죄들을 하나님 앞에 자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들을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신자들을 향하여 열려 있는 문입니다.

A. 자백의 대상이 누구인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죄들을 자백하라고 했을 때 그 대상을 누구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백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 용례를 절대적으로 강조해서 모든 죄들을 다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지나친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사도가 그런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 단어를 사용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자백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회개와 자백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관련된 죄에 대하여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자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들이 그렇다고 못박을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죄를 자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자백한다는 개념입니다.

B. 자백의 결과: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이렇게 죄들을 자백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도 요한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죄들을 용서해주시고, 둘째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용서해주신다는 표현은 빚을 탕감해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빚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죄를 주장할 수 없고 주장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할 때, 불의는 죄로 말미암은 더러운 흔적 즉 오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들을 자백하는 신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서 죄의 흔적들까지도 남김 없이 말끔하게 씻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C. 용서의 근거: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9) 그리고 그 아들 예수의 피(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로 하나님의 미쁘심과 의로우심을 말합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시다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죄들을 자백하는 자들을 용서하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죄들을 자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은혜로우심이나 긍휼하심이나 자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용서의 근거로 썼습니다. 왜 그렇게 쓰고 있습니까? 바로 앞 7절에서 언급한 ‘그 아들 예수의 피’를 가리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쏟아 부으심으로 그 아들 안에서 우리 모든 택하신 백성의 죄들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증명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들의 용서는 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용서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4. ‘신자의 죄들’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가 범하는 죄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신자들이 범하는 죄와 불신자들이 범하는 죄는 성격과 결과가 다릅니다. 신자의 죄는 율법을 범함으로써 율법이 정한 형벌과 저주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게 만들어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죄가 아닙니다. 지금 묘사한 것은 불신자들이 짓는 죄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신자의 죄는 그런 운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슬프게 해드리는 죄입니다. 신자의 죄는 하나님과 자녀됨의 관계를 끊어내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함으로써 교제/사귐의 단절과 깨어짐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신자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자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에 문제가 없고 기쁨을 누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6절에서 지적했듯이 거짓말입니다.

신자의 죄들이 율법이 정한 형벌과 저주를 가져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의 죄들은 모두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시간적으로 2000년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과거와 미래에 살았고 살게 될 모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들의 ‘모든’ 죄에 대한 율법의 형벌과 저주는 이미 주님께서 다 남김 없이 받으셨습니다. 속죄가 이미 다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죄들을 자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죄들을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속죄를 회개하는 자녀에게 적용하여 주심으로써 그 심령을 회복시켜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끊어진 사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양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죄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강 넘기거나 모른 척하게 된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편안함을 가질 수 없을 것은 자명합니다. 양심이 불편한데 어떻게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의 경험들도 이것을 얼마든지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들을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사귐 속으로 다시 들어가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 날마다 회개하는 삶 = 죄와 싸우는 삶
우리는 날마다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들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은 신자의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지할 수 없고, 또 그 사귐의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들을 자백하는 회개는 죄와 싸우는 신자의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는 것이거나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아실 것입니다.

5. 위험: 죄와 싸워 이기는 삶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그릇된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죄와 유혹에서 건짐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그리스도를 닮기를 사모하지만, 진리의 지식에는 무지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유혹들입니다. 이들은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에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일을 과장하려는 유혹이나 혹은 성령님의 능력을 과장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죄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현혹됩니다. 이것이 1세기 말,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 교회 안에 불어닥치고 있던 흐름이었고,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개 이런 류의 가르침들은 다 이단이거나 사이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제2의 축복을 받으면 어떤 상태에 도달한다든지, 완전히 하나님께 항복하면 그런 죄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든지, 깨어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가르침들이 모두 다 위험한 비성경적인 가르침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범죄합니다. 이 땅을 살며 우리의 성화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서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완전해야만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죄들을 범한다고 할지라도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낸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6. 적용과 교훈
그러므로 참된 신자의 합당한 태도는 죄가 없다고 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죄들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빛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죄에 대한 인식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신자의 삶은 죄와 싸우는 삶입니다. 죄와 싸우는 삶은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시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 죄들을 자백하는 삶입니다. 이 문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넓게 열려 있습니다. 이 은혜를 아십시오. 이 은혜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죄와 싸울 힘을 더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