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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5) - 빛 가운데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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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5) - 빛 가운데 행하라

요한일서 1:5-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3-27

말씀내용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 즉 영생을 누리는 것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라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사귀기 위한 전제로서 “하나님이 빛이심”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빛’이라는 은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로써 말하고자 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만일 그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 한다면 거룩함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사도가 지금 이 서신을 기록하는 목적은 이 서신을 읽게 될 독자들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또한 사도 자신과 함께 하는 사귐의 관계를 누리고 거기서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귐을 진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제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이것은 요한일서의 개요를 보여줍니다.
1. 사귐의 장애물들
사도가 제일 먼저 영적 사귐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다루는 것은 죄와 불의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1장 5절에서 2장 2절까지 다루어집니다. 죄와 불의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 잘못된 가르침을 가졌거나 죄와 불의를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영적 사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영적 사귐의 장애물은 형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2장 3절에서 11절까지 그 문제를 다룹니다. 형제와의 불화한 관계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고 그런 관계가 유지된다면 하나님과의 사귐도 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형제와의 사귐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요소는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2장 15절에서 17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함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지적하는 영적 교제의 장애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혹은 교리입니다. 2장 18절부터 27절에서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당시의 이단들이 걸고 넘어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이었다면,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잘못된 가르침이나 교리가 가지는 진리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학으로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바른 신학 위에 바른 신앙이 세워집니다. 이렇게 사도는 하나님과의 사귐뿐 아니라 믿는 형제들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네 가지로 제시합니다. 사도는 이 동일한 장애 요소들을 뒤에서 또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2장 28절에서 3장 10절까지에서는 죄의 문제를 다시 지적하고 3장 11절부터 24절에서 형제 사랑의 결핍을 다루고, 4장 1절과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이 요한일서가 가지는 구조적인 특징입니다. 반복하면서 올라가서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나선계단과 같은 구조입니다.
2.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테스트되어야 한다(1:6).
요한일서가 이와 같이 영적 교제의 장애물들을 부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뒤집어보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가지는 특징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 얻는 믿음은 죄와 싸우고 형제를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교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한 가지 중요한 명제를 전제합니다. 6절에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이라고 쓰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라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나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추종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은 하나님과 영적 사귐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이단들이나 사이비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자기들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입으로 신앙을 주장한다고 해서 다 믿을 것이 아니고 테스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A. 형제의 신앙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형제의 신앙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형제의 신앙을 진정성 있는 고백과 함께 받아 주어야 합니다. 신앙을 테스트해야 한다는 말은 종종 과도한 실수를 교회 안에 낳기도 했습니다. 가령, 완전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형제의 신앙을 재단하는 실수입니다. 완전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구절을 잘못 이해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떤 성숙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 때)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형제의 신앙을 재단하거나 의심하는 태도는 요한일서의 의도와 어긋납니다. 다른 형제의 신앙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의심하는 것은 결국 교회를 허물고 우리 자신의 신앙도 허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율법주의라는 독버섯이 자라게 됩니다. 요한일서는 그와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서신입니다. 신자들을 참된 확신에 이르게 하고, 그들이 영적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함으로써 주님의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려는 것이 이 서신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의 거짓 신앙을 분별하는 일은 꼭 필요했습니다.
B. 비판하지 말고 분별하라(마 7)
이것은 주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도 관련됩니다(마 7:1). 어쩌면 사도 요한이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테스트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거짓 교사들과 추종자들이 주님의 이 말씀으로 반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는 지금 우리를 비판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 대목에서 하신 또 다른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여기 ‘알라’는 말은 대충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간파하여 확실하게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즉 분별하라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입으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다 형제라고 여기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다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뿐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향한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과 사귐이 있다고 했고 또 봉사도 하고 능력도 행하는 자들이었지만 사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불법이 그들의 모든 주장과 고백의 정당성을 부인합니다. 교회가 온전하게 서려면, 성도들은 이런 분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믿는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사람(6)
사도 요한이 여기서 언급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는’ 사람은 단순히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지만 때로 넘어지고 실패하는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는 여기서 영지주의라는 이단의 가르침을 추종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단순히 죄를 짓는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행한다’는 말이 헬라어 시제로는 계속성을 보여주는 말인데, ‘습관적으로 어둠 가운데서 사는 것’ 즉 한 사람의 계속적인 존재를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이미 사도는 5절에서 하나님이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그 사람도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도는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는 불신자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6절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생각되는 말씀은 요한복음 8장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의 의식과 생각 속에 그리고 행동과 삶 속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일 뿐 아니라,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하는 거짓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그리고 우리 신앙은 육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것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는 사도의 지적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4. 참된 신앙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으로 입증된다.
7절은 참된 신자의 삶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행한다’는 말은 계속성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마음의 계속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행동에 있어서 완벽히 거룩한 상태,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과의 사귐을 얻게 되고 죄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순서로는 그 반대입니다.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너희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신앙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으로써 증명이 됩니다.
5.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행복
사도는 더 나아가서 빛 가운데 행하는 참 신자들이 누리는 행복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우리와 사귐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는 것은 빛이시며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지금 사도가 말하는 바,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A. 형제들과의 사귐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사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와 사귐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드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신앙이란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자기는 하나님과 아무도 알 수 없을 신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나와 동일한 사귐을 가지는 다른 형제들과의 사귐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족입니다. 사도는 이 새로운 가족의 사귐이야말로 빛 가운데 행하는 신자가 누리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B.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심
이것뿐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빛 가운데 행하는 참된 신자가 누리는 행복은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깨끗하게 한다’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의미를 가지는 현재시제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한 번 일어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신자도 죄를 짓습니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일을 경험하고 누립니다. 그 대상은 ‘모든 죄’입니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이깁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에게 보장된 행복입니다.
6. 빛 가운데 행하는 삶, 부활의 생명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주님 재림의 날에 부활할 것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이미 그 부활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 죽을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 안에 새로운 가족, 새로운 형제와 자매들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주님의 식탁에서 성찬을 함께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형제요 가족임을 선언하고 이 사귐의 관계 속에 들어왔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오늘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와 행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포도주로써 그 피를 기념합니다. 이 복되신 주님의 식탁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행복을 새롭게 경험합니다. 우리의 부활 생명은 결코 세상의 식탁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부활생명은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그리스도로 배부름을 얻는 생명입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 가운데 행하면서 그와 복된 사귐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넘어지고 범죄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여기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복된 은혜를 바라고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