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요한일서 강해 (4)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강해 (4) - 하나님은 빛이시라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일서 강해 (4)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3-20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상고할 주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위대한 선언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입니다. 이 주제를 상고하기 전에 우리는 요한일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경험: 신자의 삶의 본질은 영생이고 영생은 사귐이다.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을 얻게 하는 것이고 또한 영적인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쁨은 사귐에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 사귐은 단순히 믿는 자들 사이의 사귐이기에 앞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사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생을 사귐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신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하신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안다는 것’은 사귐을 이미 함축하는 말입니다. 이 사귐 곧 영생은 신자에게 기쁨만이 아니라 확신을 줍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영적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자의 삶의 본질은 영생이고 영생은 사귐입니다.
2. 사귐의 전제: 사귐의 당사자를 아는 지식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사귐이 가능 하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합니까? 사귐이 가능 하려면 사귐의 당사자들에게 서로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상대뿐 아니라 자신을 아는 지식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도 알아야 합니다. 사귐의 상대를 잘못 알고 있거나 자신에 대한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된 사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귐의 당사자를 아는 지식은 정확해야 하고, 이 지식이 부정확하거나 부족하면 그만큼 사귐의 질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가 요한일서라는 서신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 지식을 ‘교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도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마음의 상태, 자기들의 물리적 상태와 같은 것들입니다. 가령, 자신들의 현실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태도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귐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지식도 우리가 대강 추측하고 가정하는 지식이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소위 신자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삶, 하나님과의 영적 사귐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장 주된 이유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 혹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자신의 실질적인 필요로부터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참된 하늘의 기쁨을 맛보거나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에 대한 참되고 바른 지식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이 시작되고 그 사귐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충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곧 확신으로 연결되고, 이런 확신은 교회 역사 속에서 수 많은 순교자들에게 가혹한 죽음을 능히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의 의미
그런데, ‘빛’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사도는 하나님의 무엇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까요? 빛은 종종 어둠과 함께, 때로는 생명과 죽음, 때로는 선과 악, 때로는 진리와 거짓, 그 외에도 많은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는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는 빛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고자 함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빛이신 하나님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언급과 함께 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선언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같은 맥락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9~21).”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도는 왜 갑자기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선언을 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사귐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고 말한 사도가 왜 갑자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망치고 방해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 요한의 의도였다면 말입니다.
4.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물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이 속성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지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루이스 벌코프의 진술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과 절대적으로 구별된다는 의미이고, 무한하신 위엄 속에서 그들을 초월하여 높이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나 은혜나 자비와 같은 모든 속성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하여,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이 가지는 사랑이나 은혜나 자비 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대적 의미에서 구별되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개념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대상이며, 절대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고, 절대적으로 압도적이시며, 두려운 위엄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이것이 본문 하반절에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는 말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적인 자기 비하로 이끄는 절대적인 무의 감각?이것을 ‘피조물-의식’ 혹은 ‘피조물-감각’이라고 합니다?을 가지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요한이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사귐의 기쁨에 대해서 말을 하다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너희와 구별되시며 너희를 압도하시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사귐’이라는 단어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저 쉬운 친구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사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들려주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 쉽게 기도의 언어를 배출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있는 곳이 성 삼위 하나님의 임재 앞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말을 하는가 묻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성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까? 모세가 불 붙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사 6:5). 성경은 이런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것, 아니 사도 요한이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과의 사귐과 그 사귐이 가져오는 기쁨의 충만을 말하려고 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기시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사귀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지식만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어떤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장애물이 아니라, 이 사귐으로부터 누릴 기쁨을 온전케 하고 충만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우리의 사귐은 그저 쉬운 상대를 만나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설명 드린 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의식 혹은 피조물-감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기 비하로 이끄는 절대적인 무의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즉,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하는 자기 인식, “나는 비천한 먼지요, 티끌과 같은 존재로구나”하는 겸비함을 말합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게 될 때, 그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는 거리의 차이만큼 경험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그리고 또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로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바로 이런 것이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 은혜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인도합니다(벧전 1:8). 이것이 사도 요한이 말하는 ‘기쁨의 충만’입니다(1:4).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기독교회가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린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은 우리를 참된 평안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불만과 불평과 원망과 시기를 멈추게 하고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환경 속에서 자족함을 배우게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제 그가 말하려고 하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이 사귐을 통해 누리게 될 기쁨을 온전하고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6. 복음의 진리: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
그런데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은 사도 요한이 만들어낸 신학적 개념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것은 어떻게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라고 말입니다. 그 소식은 1절에서 말한 ‘생명의 말씀’이고 2절에서 말한 ‘영원한 생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저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인 복음을 포함한다는 것을 설명 드렸습니다. 여기 5절에서 사도는 다시 그것을 ‘소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는 자신을 ‘우리’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사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 그룹의 권위로서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이 소식?복음?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들은 소식이고 그 소식을 지금 그대로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소식은 사도가 생각해서 만들어낸 철학이나 신적 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써 사도를 통하여 전달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가 취사선택하거나 변개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7. 교훈과 적용
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을 두 가지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A. 기독교 신앙과 경험의 토대: 성경의 객관적 계시
기독교 신앙과 경험이 서야 하는 토대는 무엇입니까? 가령,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사도 요한이 생각해낸 신학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들은 소식이며 객관적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경험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기발한 생각이나 아이디어, 신비한 체험이나 어떤 말씀에 대한 기막힌 해석 위에 토대를 두지 않습는다. 우리 신앙과 경험의 유일한 토대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객관적이어서 우리의 모든 주관주의적 성향과 체험적 신비주의를 해석하고 통제하는 기준입니다. 어떻게 은사들이나 영적 현상들의 진위, 그 출처가 하나님인지 마귀인지 구별합니까? 객관적 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살전 5:21). 절대로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해석, 다른 사람들의 도전에 의해서 성경이라는 토대를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이 자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에 여러분의 신앙과 경험의 토대를 두어야 그 신앙은 정상적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과 경험의 토대는 성경의 객관적 계시이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읽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킨다(벧후 1:4; 고후 3:18).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변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십니까? 그것은 사귐입니다. 우리는 사귐이 얼마나 강력한 변화의 수단인지 인간 관계 속에서도 경험합니다. 어린 아이가 걷는 모습이 흡사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닮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집에서 늘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즉 사귐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존경하는 사람의 말투나 제스처를 무의식적으로 닮게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곧 하나님을 닮은 자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그 앞의 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또는 ‘경험함으로’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으로써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이 사귐이 변화의 동력이 되는 열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만큼, 우리의 말씀 읽기와 기도, 성찬과 성도의 교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지식을 다른 말로 경외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경건은 우리를 자기의에 빠진 교만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교제는 교회를 천박한 시장터로 만들어놓을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기도는 우리를 가증한 위선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보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할 것이고, 우리를 참된 은혜의 자리로 데리고 갈 것이며,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주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벧샬롬의 모든 권속들이 다 이와 같은 은혜에 이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