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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 - 그리스도인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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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 - 그리스도인의 경험

요한일서 1: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3-13

말씀내용
교회를 흔드는 이단 사상들을 논박할 뿐 아니라, 그 이단 사상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세워주려는 마음으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을 주고 영적 사귐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확신과 기쁨, 이 두 개념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우리는 확신으로 구원 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기쁨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가 이 서신에서 다루는 것은 그의 독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을 얻고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 하나님 말씀의 심오한 진리 위에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참된 기쁨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신학과 교리, 말씀이 없이도 얼마든지 심리적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심오한 진리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때, 참된 위로와 신령한 기쁨도 맛보게 됩니다. 말씀을 떠난 위로나 진리를 떠난 기쁨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무관한 심리적 위로를 추구하고 그것을 제공하는 경향이 교회 안에 두드러지게 많아지는 것은 심히 슬픈 일입니다. 그런 위로는 사실이 아니라 낙관적 바램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장에 위로가 될지는 모르나 상황에 따라서 뒤바뀌는 위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심오한 진리에 뿌리내린 위로는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여 신자에게 참된 기쁨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위로야말로 신자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위로인 셈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이 강조하는 논지이고, 요한일서가 서 있는 기초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본질: 사귐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본질을 아는 것은, 왜 성도의 위로가 신학적이고 교리적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A. 아버지와 그 아들과의 사귐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본질은 3절 하반절에 쓴 대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3에서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안다’는 것은 매우 포괄적이고 사귐을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앎이 없는 사귐은 불가능합니다. 사귐은 앎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위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의존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교리이고 신학입니다.
i. 아버지와 그 아들과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을 아는 지식 위에 근거한다.
우리는 신학이나 교리를 경험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양자는 분리되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이 영적 사귐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을 주님께서 왜 영생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귐을 의미하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물질까지도 공유하는 아주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그 이상입니다. 이 사귐은 ‘생명’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 아담 아래 태어난 모든 인류는 다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명은 영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죽은 삶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참 생명,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사귐을 완전한 의미에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이제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귐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고 경험되겠습니까? 영생이라는 사귐은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서 가장 깊게 경험됩니다.
ii. 영적 사귐의 질은 기도 생활의 질로 측정된다.
단순히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참된 영적 사귐?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해서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기도생활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이것 달라, 저것 달라’는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설령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혹은 세계 선교를 위해서 구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기도의 중심에 기도하는 사람이 정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마음 중심에 공유하고 느끼고 바라면서 기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 깊어지려면, 두 사람이 서로 공유하는 관심사가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좀체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화가 겉돌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사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잘못 배웠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그리스도인의 삶, 경험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대의와 뜻이 충만하고 뜨겁게 그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기도는 깊고도 즐거운 사귐이 될 것입니다. 이점에서 여러분 자신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기도는 어떤 비중을 차지합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시간입니까? 아니면 힘겹고 피상적이며 지겨운 시간입니까?
B. 그리스도인의 나눔
만일 여러분의 기도생활이 즐겁고 영광스러우며 기쁨이 충만하다면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할 것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런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충만해지기를 원하는 기쁨은 단지 자신만의 기쁨이 아니라, 그와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이 서신의 독자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경험되는 기쁨을 성도들과 나누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경험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교제와 전도가 일어납니다.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바로 이 기쁨, 사귐으로부터 발생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게 하고, 몸의 지체들을 사랑하고 교제하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는 연료가 됩니다. 이 기쁨이 사도로 하여금 자신이 보고 들은 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나눔’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교제와 사랑, 봉사와 섬김, 전도와 선교 이 모든 것들을 다 함축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나눔을 포함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보편적이다.
이 충만한 기쁨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사귐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이 사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 근거합니다. 신학과 교리로부터 분리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이와 같이 각 사람의 주관적 느낌이 아닌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 경험은 보편적 성격을 가집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보편성을 가집니다. 이뿐 아니라, 영적 사귐의 경험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어떤 한 인격이 거짓이 없는 진실한 인격이라면 사람들이 그와의 사귐을 통해서 경험하는 바가 다양할지라도 그 경험의 본질에는 당연히 보편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동일한 인격과의 만남이고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시험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test everything; hold fast what is good.?ESV)”고 권면했습니다(살전 5:21). 문맥상 본문은 예언의 은사를 테스트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예언이 성령의 은사라고 해서 무조건 분별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테스트하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경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시더라”고하는 특별한 ‘경험’들이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특정인들의 특별한 경험들을 테스트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명령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경고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경험을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언제나 교리와 일치하고 교리로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설명하는 영적 경험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시험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5. 고대 영지주의와 현대 신비주의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때의 상황과 오늘 우리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강조했던 것이 ‘경험’이었다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단들도 하나같이 ‘경험’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단은 경험을 강조하고, 경험을 진리보다 우위에 두고, 경험으로 진리를 해석하려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언제나 진리가 경험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성경의 진리의 토대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야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A. 고대 영지주의
고대 영지주의는 자신들의 경험은 누구도 질문할 수 없고 테스트할 수도 없는 비밀스러운 지식의 경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신학과 교리가 아닌 자신들의 영적 경험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그들에 의하면, 그 경험은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것에 의해서도 테스트될 수 없는 성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의 경험은 객관적인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이 강조하게 된 것은 느낌과 경험이라는 주관적 특징들이었습니다.
B. 현대 신비주의
이점에서 오늘날의 각종 이단이나 신비주의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 이들이 강조하는 특징은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오류 없이 성경을 쓰게 하셨던 성령의 영감이 오늘날에도 주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성경과 성경공부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이 아니라 어떤 일부분의 성경이고, 또 그것에 대한 그들 자신의 느낌이나 해석을 의존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거룩과 죄의 교리를 성경만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이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회개를 요구합니다. 회개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경험 자체를 강조할 뿐, 경험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테스트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느낌을 통제할 이성의 기능을 경시하기 때문에 기준이 명확하게 주어질 수 없고 늘 치우치고 과도한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6. 기독교
주관적 경험을 앞세우고 강조하는 것이 고대 영지주의와 오늘날의 신비주의 그리고 각종 이단들의 일반적 특징이라면, 기독교는 언제나 객관적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최우선에 둡니다. 기독교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주목하는 것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립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느낌에 의존해서 자기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대로 영원하고 불변하며 전능하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대로 모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변개할 수 없는 사실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누립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고 알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7.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나아가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남은 삶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겠습니까?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각종 이단과 신비주의가 난무하는 환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전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믿고 그 말씀 위에서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고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는데 우리의 모든 노력과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지식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 피상적이고 겉도는 기도생활이 아니라 점점 더 영광스럽고 즐겁고 행복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도록 은혜를 구하면서 앞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이단과 사이비적 가르침을 분별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풍성하고 깊게 누리는 복된 은혜로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