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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6.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 - (8). 뜨겁게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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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6.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 - (8). 뜨겁게 섬겨라

요한계시록 3:14-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2-21

말씀내용
1. 고대 세계의 자랑, 라오디게아: 은행도시, 옷감과 피혁산업, 의과대학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편지를 받은 일곱 교회의 마지막 교회이자 사데 교회와 함께 가장 심한 책망을 들은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가 있던 그 어느 도시보다도 부를 자랑하는 도시가 바로 라오디게아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을 가장 잘 반영해주는 것이 라오디게아일 것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주의가 고대의 이 도시에 팽배해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의 은행업무를 관장하는 도시가 라오디게아였는데, 그것은 로마제국의 세 개의 주요 무역로가 만나는 곳이 이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금 보유량도 엄청났습니다. 이 도시는 자본주의 세상의 뉴욕 월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도시의 부를 떠받치고 있는 산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옷감과 피혁산업이었습니다. 특히 보랏빛을 띠면서 윤기가 있는 검은 양모는 라오디게아의 특산물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빌라델비아와 마찬가지로 지진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후 17년, 사데와 빌라델비아가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 라오디게아도 도시 전체가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황제의 도움으로 재건이 되었으나 주후 60년 다시 지진으로 도시가 황폐화되었을 때에는 황제의 도움을 거절하고 자체의 힘으로 폐허 가운데서 일어날 정도로 부를 갖춘 자부심있는 도시였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주님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고 하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말을 지적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이 자부심에 한 몫을 담당한 것은 유명한 라오디게아 의과대학이었습니다. 특히 안과가 유명했는데 눈을 치료하기 위해서 고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를 찾았다고 합니다.
2. 주님께서 비웃으시는 가치들
이런 고대 세계의 자랑, 라오디게아에 세워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지적은 너무나 통렬했습니다. 그들은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해서 토하고 싶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표현 자체가 강하고 자극적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할 만큼 부유한 그들을 향해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과대학이 있어서 그 어느 도시보다도 안과적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눈이 먼 소경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옷감과 피혁산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텐데 그들을 벌거벗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있었고 금이 있었는데 주님은 그런 것 말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진정한 부요함을 얻으라고 도전하십니다. 이들이 가진 금과 돈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견디지 못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가진 돈으로 흰 옷을 사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안약을 사서 그들의 보지 못하는 눈에 발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그들이 가진 모든 자만심과 자기 만족, 자기 신뢰를 비웃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 권력, 부, 명예를 추구하면서 살 뿐 아니라,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얻고자 하고, 수고하여 살아가는 가치들이 만일 주님께서 비웃으시는 가치들이라면 우리는 비참하고 가련한 인생들입니다. 지금도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주신 주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안에 많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도시 주민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이 정확한 말씀입니다.
3. 미지근한 신앙은 위험하다.
차지도 덥지도 않다는 말씀을 생각해보십시다. 여기서 덥지도 않다고 된 말은 사실은 비등점을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에 뜨겁지 않다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근도시인 히에라폴리스는 약효가 있는 뜨거운 온천수로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인근도시인 골로새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로 유명했습니다. 이들 두 도시의 물들과 비교하면 라오디게아의 물은 사람을 시원하게 해줄 만큼 차거나 시원하지 않았고, 약효를 줄 수 있는 뜨거운 온천수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라오디게아 주변의 온천수도 약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 물은 미지근할 뿐 아니라 물맛이 고약해서 구토를 일으킬만한 물이었다고 합니다. 또 성공과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라오디게아로 몰려들어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 공급이 원활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인근 도시로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물은 파이프를 통해서 먼 거리를 흘러오면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이 되었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 만족스럽지 않은 물을 먹으면서 그 물에 침을 뱉고 싶다고 느끼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차지도 덥지도 않다는 주님의 말씀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미지근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흐리멍텅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주님께서 무엇을 의도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고 이율배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아무 역할도, 기능도 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뜨거워서 사람들에게 좋은 치료의 역할을 하든지, 차가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든지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그리고 사람들이 토해버리고 싶은 존재일 수 없습니다.
4. 문제의 핵심: 자기 만족, 자기 신뢰
이들의 미지근함의 문제의 근원에는 자기 만족과 자기 신뢰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자만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직하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실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 진짜입니까? 우리가 얻고자 하는 물질적 부, 우리가 누리고 싶어하는 성공과 출세와 명예가 진짜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성있게 그런 것들은 지나가는 아침 안개 같고 풀의 꽃 같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실재는 영적 실재입니다. 주님의 평가대로, 그들은 자신들을 수식해주는 집과 차와 온갖 것들에 의해서 설명되는 부자가 아니라, 사실상 영적인 거지이고, 온갖 명품으로 꾸며 입은 자들이 아니라 수치스럽게도 벌거벗은 자들이며, 안과대학이 있어 좋은 안경과 온갖 의료 혜택을 입어 눈이 밝은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영적인 소경들이라는 것이 주님의 지적이라면, 오늘 우리도 이들과 함께 주님의 판단과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말씀은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점잖게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을 향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누리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외적 조건들이 여러분의 영적 실재를 정직하게 볼 수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최고의 비극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 가난함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절망적이고, 도움이 없는 영적 상태임을 압니까? 이것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나아가며, 그리스도를 필요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부와 성공이라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를 자기 만족과 자기 신뢰로 이끎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5. 뜨겁게 섬겨라.
이것이 만약 여러분의 이야기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첫째는 열심을 내라는 것이고 둘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명령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현재형 명령인데, 이것은 전생애에 걸쳐서 계속해서 열심을 내서 주님을 섬기는 일을 그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반면 회개하라는 말은 부정과거라는 헬라어의 독특한 시제인데, 이것은 단 한 번의 행위를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회개가 단 한 번의 출발점이라면, 열심을 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일평생 계속해서 힘써야 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시작이 없다면 그 이후의 삶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출발점은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뒤로 떨어지고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회개함으로써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회개가 우리의 변화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회개가 없이 회복되는 열심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변화가 아닙니다. 회개가 단 한번의 행위를 의미하는 명령으로 쓰여졌다는 말씀이 마틴 루터와 같은 신학자들이 가르쳤던 “신자의 전생애는 회개다”하는 말과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발점으로서의 회개 행위가 없이 주님께 돌아와 회복하고 열심을 내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삶에는 계속해서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회개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 바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라고 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뜨겁게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은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 생활입니다. 열심은 광신이 아닙니다. 열심은 사려 깊은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부분적인 헌신은 헌신이 아닙니다. 열심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모순이고 이율배반이듯이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은 정상입니다. 미온적인 태도로 신앙 생활을 하시지는 않습니까? 관망하고 계십니까?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는 입장입니까? 목사와 당회가 어떻게 하나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없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경꾼입니다. 그 나라에는 구경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경꾼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심을 내십시오. 열심을 회복하십시오.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일평생 동일한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6. 문을 열고 그리스도와 함께 먹는 삶으로 돌아와라.
우리에게 20절 말씀은 낯익습니다. 전도할 때 많이 사용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구절은 전도용으로 주어졌다기 보다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고 있다가 지금은 소원해지고 관계가 멀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는 주님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심판하시기 위해 문 밖에 서계신다는 이미지는 주님 자신이, 그리고 야고보 사도도 사용한 바 있습니다(막 13:29; 약 5:9). 그러나 이것 보다는 우리가 마음 문을 열기를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주님은 더욱 의도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너무나 그리워하여 한 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아가서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아 5:2). 주님께서 이렇게 문을 두드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와 함께 먹으시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먹는 것은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교제를 상징합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세끼 중, 아침은 마른 빵을 포도주에 찍어먹었고 점심은 밖의 거리에서 먹었는데, 저녁만큼은 오랜 시간 이야기하면서 즐겼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문으로 들어와 함께 잡수시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저녁 식사의 교제를 원하시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Holman Hunt의 그 유명한 그림이 대작이 된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 핵심을 말해줍니다. 안에서만 열수 있도록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문을 설계하셨고 창조주 조차도 강제로 그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울적하고 힘들 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인생의 전투를 싸워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며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 사랑 때문에 책망하셨다!
우리는 이 일곱 번째 교회를 향해서 심한 책망을 하시는 주님으로부터 뜻 밖의 말씀을 또 듣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란 말씀입니다(19).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책망하고 징계한다고 하십니다. 그 어느 교회를 향해서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으셨는데 이제 그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설교자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해하지 않도록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에 말한다”고 하십니다. 사랑하셔서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잡수시기를 너무나 갈망하셔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왜 토하시겠다고까지 말씀하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토해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더불어 함께 먹고 교제를 즐기시고 싶으셔서 그러신 것입니다. 사랑이 주님의 책망의 유일한 동기입니다.
8. 아멘이고 충성된 참된 증인인 교회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적인 신뢰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인격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을 또한 보여줍니다.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반응하신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반응하는 사람의 인격은 신뢰할만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얼마나 다릅니까?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런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멘이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겠습니까? 그 교회는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거나 미지근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 교회는 뜨겁게 섬기는 교회,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결코 숨기거나 가두어둘 수 없는 열심과 열정이 흘러나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 열심과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어 모셔 들이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살아가는데서 나오는 열심과 열정입니다. 주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직도 소망이 있기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대표되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향해서 그리고 특별히 지난 8주 동안 우리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외적으로 나타나는 그 어떤 것들에 의해서도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영적 실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실상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바라시는 교회의 마지막 특징은 열심입니다. 열심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며, 교회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잃어버린 열심을 회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회개라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 중심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임재하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이 들어오시게 합시다. 열심을 회복하는 자, 회개하는 자, 뜨겁게 섬기는 자리에 돌아온 자들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주님께서 싸움을 이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자리에 앉히시고 영원히 우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교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살아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교제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축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그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자들만이, 장래에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릴 것입니다. 회개의 출발점으로 돌아와서 열심을 품고 뜨겁게 주를 섬기는 복된 여러분과 우리 벧샬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