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8).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교회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8).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8).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교회

요한계시록 2:18-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1-12

말씀내용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 중 우리는 이제 네번째이자 중간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버가모 교회를 살피면서 칭찬과 책망을 나누어 살펴보았듯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도 칭찬과 책망을 나누어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1. 두아디라의 당시 상황(행 16:12-15)
두아디라는 일곱 교회가 소재한 도시 중 가장 덜 알려졌고 주목받지 못하는 도시였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해 고고학적 발굴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두아디라에 대한 고대 자료도 빈약한 까닭에 고대 두아디라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콜린 헤머(Colin J. Hem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곱 개 메시지 중 가장 길고 어려운 서신이 가장 알려지지 않고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돋보이지 않는 도시를 향해 쓰였다.”
두아디라가 비교적 덜 알려진, 덜 주목받는 도시였던 것에 비하면, 헤머가 말했듯이, 두아디라에 주신 말씀은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 중 가장 길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의 두 배를 훨씬 넘습니다. 두아디라는 로마 제국에서 영향력 있는 도시가 아니었던 까닭에 황제 숭배의 압박도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다만, 내륙의 무역로에 위치한 두아디에서는 상업과 제조업 등이 발달하였고, 특히 다양한 상업과 제조업 길드로 유명했습니다. 길드는 상인과 장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조합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가령, 제화공 길드, 염색옷의 제조공과 판매자 길드, 청동 세공사 길드 등은 고대 비문에서도 발견되는 조합들이었습니다.
길드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는 아니었지만, 참여를 거절하는 것은 신용과 직업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로, 길드는 시민 생활의 중심에 있었고, 길드에 속하지 않은 상인이나 노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길드는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당시 일곱 교회가 소재한 도시들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가 되곤 했는데, 그것은 길드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길드는 거의 다 지역의 종교 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가 된 것입니다. 길드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은 연중행사와 같은 것으로 이방신전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하고 우상의 제물을 함께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거의 경제적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길드에 대한 대처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생활, 경제생활과 관련되어 있는 이런 문제에서 분명한 말씀의 원리 아래 하나가 되지 못했고, 언제나 거짓 교사들에 의한 거짓 복음과 거짓된 가르침들이 이 모호함의 영역으로 헤집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사도들이 살아있던 초대교회에도 이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온전하고 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교리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 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아디라에 대해서 이 본문을 제외하면 사도행전에서 단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 일행이 유럽의 첫 도시인 빌립보에 이르러 그곳에서 만나 유럽에서 얻은 첫번째 열매는 루디아였습니다. 그녀가 바로 두아디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12-15입니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2–15).”
루디아는 두아디라가 자랑하는 자주빛 염료로 물들인 옷감을 파는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고 묘사되는데, 이것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그녀가 두아디라에서 개종했다면, 두아디라에도 어느 정도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우리는 당시의 두아디라를 이해하고 이제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주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불꽃 같은 눈, 빛난 주석 같은 발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18; 1:14b-15a, 13; 단 7:13-14; 3:25; 10:6)
먼저 두아디라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를 보겠습니다. 18절 하반절입니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헬라어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분이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물론 사도 요한이 환상에서 본 그리스도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1:14 하반절에서 15절 상반절입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사도는 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썼을까요? 사실, 1장에서 사도가 본 환상에서는 이 표현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1:13).
두아디라 시민들은 제우스의 아들로 두 신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는 두아디라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튀림노스(Tyrimnos)인데, 이는 그리스의 태양신 아폴로와 동일한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제우스의 아들로 여겨진 것은 로마 황제였는데, 제우스의 아들 튀림노스가 황제의 수호신이기도 했기에, 별도의 황제 숭배의 관행이 다른 도시에 비해서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두아디라 시민들이 황제와 튀림노스를 제우스의 아들로 여기는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은 황제도 아니고 튀림노스도 아니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입니다. 사실,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서에서의 인유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다니엘 7:13–14).”
물론 이 인자는 예언된 메시아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인자로 언급된 이 분이 다니엘 3장에서는 다르게 표현됩니다. 상황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벨론 왕의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므로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된 상황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풀무불 속에서 걸어다니는 네 사람을 보게 되는데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라고 말입니다(단 3:25).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다니엘 7장의 인자와 다니엘 3장의 ‘신들의 아들’을 동일 인물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해석을 담아,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에 맞추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두아디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황제나 튀림노스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라는 선언이라면, 또 다른 한편으로 두아디라에서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선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불꽃 같은 눈을 가지셨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묘사됩니다. 이것은 다니엘 10:6에서의 인유입니다.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다니엘 10:6).”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뒤에서 두아디라 교회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시고 판단하시고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물론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놋쇠가 두아디라의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과도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만, 주님이 지니신 힘과 광채를 보여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놋이 상징하는 것이 주로 심판이듯이, 이것은 뒤에서 심판의 주제로 연결됩니다.


3. 네 사업들—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19; 2:4; 고전 10:12; 마 5:3; 애 3:23)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은, 칭찬이었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요한계시록 2:19).”
여기서 주님은 다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시는데, 첫째 단어인 ‘사업’은 뒤에 네 단어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첫 단어 ‘사업’은 복수인데, 나머지 네 단어는 모두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네 사업(들)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뒤에서 다시 ‘너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째 단어와 뒤에 네 단어를 구분하고 있는 것도 선명합니다.
사업이라는 단어는 19절 하반절에서 ‘네 나중 행위’라고 할 때 행위와 같은 단어입니다. 주님이 칭찬하신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입니다. 이 네 단어는 둘씩 묶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활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라면, 섬김과 인내는 그로 인해 뒤따르는 결과요 열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섬김과 인내는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은 봉사, 사역, 직무 등 을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에서 온 말입니다. 영어로 집사를 의미하는 deacon 이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로운 봉사와 헌신과 환대의 사역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내는 어떻습니까? 인내는 요한계시록에서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운 태도를 포함하기에, 그 뿌리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칭찬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들’은 다름 아닌 증거의 사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함께 등장할 때, 그것은 모든 반대의 상황을 무릅쓰고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그레고리 빌은 말합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두아디라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잘 감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2:4).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단들과 싸우며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도 잃어버리고 냉담한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행위(들)’은 바로 앞에서 사용한 ‘사업(들)’은 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에베소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 사이에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점점 잃어버렸는가 하면, 두아디라 교회는 그것이 점점 더 커졌고 깊어졌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여러분은 에베소 교회에 가깝습니까, 두아디라 교회에 가깝습니까? 여러분은 처음 행위가 나중 행위 보다 낫습니까,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 보다 낫습니까? 신앙생활은 처음에 얻은 잔고를 쓰면서 바닥이 날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제가 작년 성탄절 메시지에서 전한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또 받는 삶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은혜를 오늘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때 받은 은혜를 우려먹고 사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교만을 경고하는 말씀을 거듭 하는 것입니다(고전 10:12).
주님은 신자의 특성을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성도의 심령은 가난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이 그에게는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에 이런 갈망이 전혀 없다면, 이 갈망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직분을 받았든, 얼마나 오래 교회생활을 했든지 여러분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처음 사랑이라고 말할만한 시작 조차 없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과연 처음 사랑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처음 것’이라고 말할만한, 처음에 가졌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지기를 구하는가 말입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 선지자가 고백한 것처럼,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애 3:23).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백한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변치 않으시는 언약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에게 텁텁하고 무덤덤한 아침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될 위험이 큰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 예레미야애가의 이 말씀은 우리가 새해맞이예배를 드리면서 상고한 말씀입니다. 2020년 366일의 모든 아침에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기를 원한다고 했지요? 그렇게 간절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목마름이 없다면 채워짐도 없습니다. 이런 갈망, 이런 목마름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간절히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은혜가 신자의 삶의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지적하여 칭찬하시는 것은 단순한 행동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통틀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섬김과 인내가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행하는 가운데, 우리가 나이들어가고 세월을 보낼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참된 경건, 하나님 닮은 성품을 빚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경건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은혜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4. 내가 올 때까지(25), 끝까지(26)! (딤후 3:14; 살전 1:3)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시야는 지금 이 순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만 바라본다면, 혹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고작 은퇴 후의 노년의 삶을 편안히 영위하는 것의 수준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타협의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5절에서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내가 올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시야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경주는 100m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70년에서 100년에 이르는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이 알아주실 수고를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날에,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요한계시록 2:19).”라고 말씀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올 때까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진리,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입니다. 엉뚱한 진리, 자기 확신, 오류로 가득한 자기 신뢰를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알고 붙잡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디모데후서 3:14).” 진리를 굳게 잡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진리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은 사도들이 전해 준 그 복음의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세상 살이의 잔꾀와 요령을 터득하여 그 방식으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있는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26절을 보지요. 주님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요한계시록 2:26).” 여기서 주님은 다시 한 번, ‘끝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라고 하신 주님은 다시 ‘끝까지’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상급 약속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라고 할 때, 끝까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일(들)’은 19절에서 ‘사업(들)’ 그리고 ‘행위(들)’와 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지만, 번역은 각각 사업, 행위, 일이라고 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맥락에서 볼 때, 주님의 일은 바로 두아디라 교회가 행하고 있던 일,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말합니다. 이 일을 너희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이 상급을 주실 것이고 주님이 알아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고 바울 사도가 표현했던 것들이 주님의 일입니다(살전 1:3). 젊은 시절 한때 뜨겁게 주의 일을 하는게 아니라, 일평생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더 많다고 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끝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끝은 25절에서 말씀한 ‘내가 올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5. 적용적 교훈—굳게 잡고 지켜라!
오늘 본문의 적용적 교훈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바른 복음의 진리를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혹은 수요일에도 복음의 진리,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을 듣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듣는다는 것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 진리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상한 복음,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굳게 붙잡는 자들이 많습니다. 거짓된 진리일수록 그것을 붙잡는 사람들의 자기 확신이 강한 것은, 마귀의 역사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참된 진리, 바른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을 매주일 듣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것을 굳게 잡고 있습니까? 들은 것, 받은 것을 굳게 잡고 살아가십니까? 그래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합니까?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둘째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를 멈추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일을 계속 감당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은혜를 받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하는 일보다,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쏟아야 하는 에너지 보다 여러분은 더 많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떠나서 은혜를 받을 길이 없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여러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성례가 은혜의 수단입니다. 성례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은혜를 사모하며 주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들을 붙잡고 주의 일을 계속해서 감당하십시오. 2020년 새해 둘째 주일입니다. 새해에도 여러분이 주의 교회에서 받은 직분과 주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십시오. 큰 은혜를 구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할 때, 언젠가 여러분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 때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요한계시록 2:19).” 그리고 우리가 감히 주님 앞에서 입을 열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