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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19 -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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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2019 -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예레미야애가 3:19-33, 로마서 8:32, 35-3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2-31

말씀내용
1. 예레미야 애가의 배경(렘 6:14; 8:11; 7:3-4)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주전 586년) 직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슬픈 노래입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 멸망을 통하여 경험한 깊은 고통과 영적 고뇌, 시온의 멸망을 실행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속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 나타납니다. 깊은 슬픔과 탄식 속에서도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절절이 고백한다는 것이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멸망 이전, 경건한 요시야 왕이 애굽과 바벨론의 전투에서 죽고 멸망하기까지의 22년의 시간도, 참으로 패악하고 불경건한 시대였습니다.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유다는 애굽과 바벨론이라는 양대 강대국 사이에서 수치와 고난을 겪어야 했고, 백성들의 삶 또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1년 반의 예루살렘 포위와 그로 인한 극심한 고난에 이어진 예루살렘 성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였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이 현실이 되기 직전까지도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메시지였습니다(렘 6:14; 8:11). 그리고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이 거짓 메시지를 그들의 위안으로 삼고 죄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쳤습니다(렘 7:3-4). 예레미야는 그가 전한 메시지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결국 그가 전한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멸망했고 성전은 파괴되고 약탈되었습니다.
성전 파괴는 유다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패배,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은 이런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뿌리 채 흔드실 때가 있습니다.


2. 우리들의 인생
여러분은 지난 삶에서, 혹은 2019년 한 해를 지나는 동안에, 여러분의 신앙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내 인생에 이런 일까지는 일어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해보셨는가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일어납니다. 남들의 이야기에서만 듣던 일,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남직한 일,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 아래로 더 깊이 추락해야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에 망하지 않았거나 성전이 파괴되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인생에도 심히 큰 어려움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신앙의 뿌리 채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 안에 비통함, 하나님에 대한 쓴 뿌리가 깊이 자리를 잡기 좋은 시간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에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보여주는 반응은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3. 예레미야가 부르는 노래(렘 29:11; 요 1:14)
19-20절을 먼저 보지요.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이 “아 슬프다”로 시작되는 예레미야애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자신이 겪은 고초와 재난을 선지자는 ‘쑥과 담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21절입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이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이 선지자의 쑥과 담즙을 소망으로 바꾼 것일까요? 선지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무엇이 절망에서 소망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까?
선지자는 자기가 겪는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는 고정된 렌즈로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그는 도리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2-23절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 두 가지를 말합니다. ‘인자와 긍휼’ 그리고 ‘성실하심’입니다. 이것은 보통 “인자와 성실”(시 98:3; 138:2), “인자와 진리”(시 25:10; 40:10,11; 57:3; 61:7; 잠 3:3; 14:22; 16:6; 20:28) 또는 “인자와 진실”(출 34:6; 시 86:15)이라고 번역됩니다. 우리가 지난 주 성탄 예배에서 상고한대로, 사도 요한은 그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표현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고초와 재난 속에서, 그리고 쑥과 담즙이 올라오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합니다. 선지자는 왕으로부터 제사장들과 우두머리들, 그리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다 크게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대하 36:12-16).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사실은 지금 일어난 일보다 더 처참하고 비참한 일이 일어났어야 마땅하고, 백성은 모두 진멸 당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애통하고 슬퍼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하는 선지자는 자신들이 진멸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진노 중에도 자비를 보이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바로 이 말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자신은 이 말씀을 백성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진멸될 수 없음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이고 또한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이 참혹한 재난의 한 가운데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했던(3:18)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이라고(3:21) 고백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상황에 따라서, 그 상황의 렌즈로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상황은 언제나 변화무쌍하여 그 상황의 렌즈로 보게 되는 하나님은 선하시다가도 악하시고 악하시다가도 선하신 변화무쌍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불변하시는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렌즈로 자기의 변화무쌍한 상황을 봅니다. 그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그리고 주의 성실하심을 통해서 자기의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24-26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바라고, 그를 기다리며,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를 말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여기서 선지자는, ‘바라리라, 기다리는, 구하는, 바라고, 기다림’이라는 유사 단어들을 반복하여 나열합니다.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 동사들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유산, 혹은 내게 떨어지는 몫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떨어질 어마어마한 유산이 있다면, 여러분은 다른데 한눈을 팔겠습니까? 오직 그 유산을 기다리고 바라보고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유산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도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이 참담한 형편 속에서 놓치지 않았던 고백입니다. 상황이 어려우면, 고난이 찾아오면 우리는 이 고백을 놓치고 맙니다. 상황의 렌즈로 하나님을 보고 싶은 유혹 때문입니다. 상황이 흔들리고 터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으시기에, 내 소망은 그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선언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본문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32-33절입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여기에 선지자가 발견한 진리가 있습니다. 근심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말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시며, 그렇게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녀들로 하여금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십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 우리는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3:25).


4. 우리가 부르는 노래(롬 8:32; 35-3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선지자가 탄식하는 애가 속에서도 소망을 말하면서 “여호와는 선하시도다”라고 선언하는 고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불러야 할 노래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28-29)”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환경 속에서 우리는 불평과 원망의 소리들을 쏟아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쑥과 담즙을 소망으로 바꾸어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신약의 언어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사도 바울 역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복음의 렌즈로 선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는 믿음을 인하여 고난 당하는 1세기 성도들의 모든 상황을 이 복음의 렌즈로 보게 합니다. 그 상황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하는 상황입니다(롬 8:36).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7-39).”


5. 우리가 맞는 매일 매일의 아침들
복음은 2019년을 마감하고 2020년을 맞이하는 이 시간에도 절실하게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상황은 2020년 1월 1일 첫 시간을 맞는다고 해서 갑자기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고백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3:22).” 많은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오 신실하신 주”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미국의 감리교 목사 토마스 치솜(Thomas Chisholm)은 이 말씀을 읽던 중 감동을 받아서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가사의 후렴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네
여기서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네 (Morning by morning new mercies I see)”는 직역하면, “매일 아침마다 나는 새로운 인자하심을 봅니다.”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무엇이 새롭습니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2020년에도 어김없이 365번의 아침을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많은 아침을 우리는 두려움과 염려를 불러일으킬만한 상황에서 맞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상황이 그럴지라도, 우리는 선지자와 같이 고백하면서 이렇게 아침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침마다, 매일 아침마다 주님의 새로운 인자하심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구하고 기다리는 우리는 “여호와는 선하시도다”라고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고 그 성실하심이 크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이런 은혜를 구하면서 2020년을 맞이합시다. 우리가 맞을 365번의 아침마다, “제가 주님의 새로운 인자하심을 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아침들이 되기를 구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렌즈로 우리의 모든 상황을 바라봅시다. 우리 눈에 똑똑이 그리고 가장 먼저 보여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스런 상황이 아니라, 변함이 없으시고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고 그 성실하심이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라고 말합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2020년, 365번의 아침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2020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