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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6). 적대적 세상에 사는 충성된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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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6). 적대적 세상에 사는 충성된 증인

요한계시록 2:12-17, 사도행전 1:8, 디모데후서 3: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2-29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버가모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칭찬과 책망 두 가지 내용을 가집니다. 13절은 칭찬이고 14-15절은 책망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 두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상고하였기에 여러분은 이 메시지의 형식을 어느 정도 아셨을 것입니다. 먼저 주님 자신에 대한 특징적 묘사가 나오는데(12절), 이 묘사는 그 교회에 주실 메시지의 내용과 깊이 연결되어, 일종의 복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끝에는 필요하다면 회개하라는 요청과 함께(16절)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에 대한 약속이 나옵니다(17절).
오늘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 전체를 다 상고하지 못하고, 12-13절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칭찬을 살펴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칭찬과 책망이 함께 나오는 경우, 칭찬의 내용이 묻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 번에 나누어 말씀을 상고하는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은 책망이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1. 검을 가지신 주님(12,16; 1:16; 엡 6:17; 히 4:12-13)
먼저 12절에서 우리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이라는 주님에 대한 묘사를 봅니다. 검을 가졌다는 것은 통치자,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1장에서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주님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1:16입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여기서 사용된 검은 많은 칼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트라키아인의 기병대가 사용하던 장검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로마시대에 이 검은 힘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런 주님이 필요했습니다. 일차적으로 주님의 검은 버가모 교회가 살던 적대적이고 반기독교적 사회—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의 교회의 원수들을 심판하실 검이고, 다른 한편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불경건한 세상과 끊임없이 타협하는 거짓 신앙고백자들을 심판하고 교회로부터 잘라 내는 검이 될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는 ‘내 입의 검’이라고 하고, 1:17에서도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라고 한 것을 보면, 이 검은 보통 생각하는 물리적 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께서 이제 그 말씀으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고(엡 6:17),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히 4:12–13). 주님이 가지신 ‘좌우에 날선 검’(12), 그 ‘입의 검’(16)은 주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버가모 교회에 검을 가지신 주님이 필요했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벧샬롬교회는 어떠할까요?


2. 버가모 교회가 사는 곳—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13)
버가모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72km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항구도시였던 에베소나 서머나와는 달리 에게해로부터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주)의 수도로서 소아시아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지성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주도적인 도시였습니다. 특히 버가모는 주전 29년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와 로마 여신 아테나’를 위한 신전을 세우는 허가를 얻음으로써, 아시아 최초로 살아있는 통치자인 로마 황제를 경배하는 신전을 건축한 도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에베소나 서머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듯이, 당시의 도시들이 황제의 신임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황제 숭배였습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에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서머나에서는 대규모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교회가 더 큰 고난을 받아야 했다면, 버가모 교회는 황제 숭배 자체로 인해 큰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13)”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권좌(보좌)가 있다는 것은, 사탄이 왕노릇하는 곳이란 말인데, 이렇게 표현한 것은 버가모가 소아시아를 통치하는 로마 제국의 지방 수도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권좌(또는 보좌)’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는 62회 나오는데, 그중 47회가 요한계시록에만 집중해서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누가 통치하는가? 누가 다스리는가? 누가 왕인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를 의미하는 보좌가 중요하게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대부분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말씀하신대로, 사탄은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불립니다(요 12:31; 14:30; 16:11). 그 중에서도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사탄의 영향력과 통치력이 강력하게 미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버가모는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을 제일 먼저 건축했을 뿐 아니라 황제에게 헌정된 신전의 ‘신전 관리인’으로 자처했습니다. 신전 관리인이라는 것은 신전 지킴이(temple keeper)라는 뜻입니다. 에베소 시민들은 자신들을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의 신전지기라고 말했는데(행 19:35),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버가모 시민들의 황제 숭배 열정이 대단했음을 보여주고 그만큼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핍박도 강력했을 것을 시사합니다.
주님께서 버가모를 향해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은 다양합니다. 황제 숭배 외에도 버가모는 도시 뒤편에 많은 신전이 서 있는 원뿔 모양의 언덕이 있었는데, 여기서 다양한 이교 신들을 숭배하는 의식들이 거행되곤 했습니다. 이 원뿔 모양의 언덕을 가리켜 주님께서 사탄의 권좌라고 하셨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중에는 유명한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가 있었습니다. 약국이나 의사 가운 또는 앰뷸런스 차량에 상징으로 사용되는 문양으로, 지팡이를 타고 올라가는 뱀을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입니다. 뱀 2마리가 올라가는 문양은 헤르메스의 카두케우스 지팡이지만, 종종 혼용되기도 합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 뱀이고 그 뱀은 버가모의 상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주님은 이곳을 사탄의 권좌라고 부르셨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옛 뱀 곧 마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9; 20:2).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버가모의 황제 숭배 열정은 대단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주님이 사탄의 권좌가 있다고 하신 것은, 이런 특별한 열심으로 행해지던 황제 숭배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가능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주님은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하셨을 것입니다(13).


3. 적대적 세상에서 충성된 증인이 되는 것(13; 1:5)
버가모 교회는 이런 적대적 세상에서 그저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자신들의 부르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부르심 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너무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셨을 때, 버가모 성도들은 위로를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너희가 이런 적대적인 마귀의 권세가 강력한 곳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가 알고 있다’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사참배를 강요 받던 일제 강점기나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증인으로 사는 것과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나름대로 성도로서 감당해야 할 도전을 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분명히 생명을 내놓아야만 하는 시대, 그런 상황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은 안디바라는 한 사람을 언급하십니다. 그가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라는 사실 외에, 우리는 그에 대한 정보를 성경 안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합니다. 성경 외의 자료에서, 로마 관리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한 안디바를 산 채로 놋쇠로 만든 황소상 안에 넣은 뒤, 그 위에 불을 가열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죽음을 죽게 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안디바를 가리켜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얼마나 놀라운 칭송인지 여러분은 그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이 말은 요한계시록 1:5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사용된 명칭입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주님은 당신의 증거로 인하여 유대인와 로마인들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안디바를 당신에게 붙여진 것과 같은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을 원문을 살려 직역하면, ‘나의 충성된 나의 증인’입니다. 주님은 두 차례나 ‘나의’라는 말을 쓰심으로써 안디바를 행한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십니다. 안디바가 황제 숭배를 거절하여 순교를 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음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세히 보면, 이것은 순교자 안디바에 대한 칭찬만이 아니라, 안디바가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버가모 교회가 그렇게 했다는 칭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된 증인이라고 할 때, ‘증인’이라는 헬라어 ‘마르튀스’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여기서 사용된 의미 그대로 ‘증인’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순교’를 의미하는 말로 의미가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르튀스’에서 파생한 영어 martyr는 증인이 아니라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얼마나 많은 ‘증인’들이 그들이 가진 증거—복음—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두 가지를 언급하시는데, 첫째는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아라(계 2:1; 히 4:14).
먼저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라는 말씀을 보지요. 이름은 인격, 성품, 사역, 교훈을 망라하는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버가모 성도들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살면서 자신들이 겪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굳게 잡는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굳게’라는 강조 부사 없이 하나의 동사입니다. 죄수를 체포한다고 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가령,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고 할 때(마 14:3; 막 6:17)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잡는다고 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마 26:50; 막 14:46). 죄수를 놓치면 죄수의 목숨을 죄수를 지키는 자의 목숨과 바꾸는 당시 관습을 생각하면, 죄수를 잡는 것이 얼마나 굳게 잡는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 주님께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오른손으로 굳게 붙잡고 계시기에, 그 어떤 세력도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고 있는 일곱 별을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전능하신 손으로 굳게 잡으신 것을 놓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것은 결국 성도의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버가모 성도들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자신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포기하면, 놔버리면 살 수 있었고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굳게 잡으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한 번 잡았다’ 혹은 ‘한 번 굳게 잡은 적이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굳게 잡았고 놓치면 다시 잡았고 또 잡았다는 말입니다. 연약해서 놓칠 때마다 그들은 다시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B.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마 10:32-33; 딤후 2:11-12).
그들은 또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10:32-33).” 1세기 말의 박해 속에서 살아가는 버가모 성도들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잊어버릴 수 없는 말씀, 그들이 굳게 붙잡을 수 밖에 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의 영적 아들이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강조하여 말한 바 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디모데후서 2:11–12).”
어떤 점에서 그들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얼마나 귀에 들어오는 말씀이며, 얼마나 굳게 붙잡을 수 밖에 없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소극적으로 그들이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충성된 증인인 안디바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가진 증거를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복음을 증거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버가모 성도들과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주님의 말씀은 유효하지 않은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은 이런 말씀은 적극적 박해의 시대에만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충성된 증인입니까?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입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복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때때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부인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전도가 금지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사회는 전반적으로 종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술은 강요할 수 있고 그것은 큰 흠이 되지 않을지라도 복음을 전할 수는 없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흠이 되기까지 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나는 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만 배나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될 뜻이 있고, 내 가슴에 새겨진 오래된 중대한 진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명예를 잃고 온갖 비난을 받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길 마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모시고 항해하는 배들은 폭풍우를 만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주께서 타셨던 배도 파도가 들이치고 가라앉기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월계관을 쓰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좌에 오르시는데 우리는 환호하는 군중들의 어깨에 올라타서 보좌에 이르기를 기대합니까? 쓸 때 없는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치뤄야할 희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마음이 없다면 돌아가서 여러분의 소유와 재산을 최대한 이용 하여 편안하게 살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이 한 마디만 여러분에게 하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 하리오?(막 8:36).”(『스펄전설교전집』p.168)
여러분은 스펄전의 이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구하시겠습니까? 정직하게 여러분 안에 이런 마음이 있다면 저는 여러분에게는 소망이 있다고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 주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더 큰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지만 만일 여러분 중에서 이 고백을 할 수 없고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면, 안디바는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 뿐입니까? 여러분은 충성된 증인이 되기를 원치 않고 다만 지옥에 가지 않을 만큼만의 최소한의 신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정직하게 여러분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면, 저는 여러분이 정말 영적으로 위험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최소한의 구원의 자리에 조차 있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참된 구원의 은혜와 그 구원을 확신하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주님의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4. 교훈과 적용—충성과 열매(딤후 3:12; 행 1:8; 계 3:8)
이제 본문의 적용점을 살피면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어느 시대나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박해가 있습니다(딤후 3:12). 그 박해는 1세기 말 버가모 성도들이 겪은 것과 같이 정치 권력에 의한 박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사회적 압력이거나 관계적 압력, 여러 모양으로 주어지는 불이익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오늘 본문의 언어로 말하면, ‘충성된 증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셨습니다. 증인은 신자, 그리스도인과 같은 말입니다. 증인이 아닌 신자, 증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안디바를 가리켜 ‘내 충성된 (내)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진 증거를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미칠 불이익이나 자신이 겪을지도 모르는 손해 때문에 증거를 왜곡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 증거가 되고, 그래서 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의 제일 조건 혹은 자질은 ‘충성됨’ 또는 ‘신실함’입니다. 사실과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충성됨과 신실함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열매에 상응하지는 않습니다. 증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가’ 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한 달란트만을 맡겨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한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스럽고 신실한 증인이 되십시오. 나중에 우리가 살피겠지만,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8b). 능력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충성됨, 신실함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실패하며 살아갑니다. 버가모 성도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이름을 다시 붙잡았습니다. 수없이 놓쳤을지라도, 그들은 다시 주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여러분의 지난 삶에서, 지난 2019년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도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했습니다. 주님 앞에 불충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을 향하여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다시 내 이름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적대적 세상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그저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충성된 증인이 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서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말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게 합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께 믿음의 용기를 달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저 문제를 해결 받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본질은 주님과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적대적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1세기 버가모 성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디바와 버가모 성도들이 그런 환경 속에서도 충성과 신실함을 지켜 주님으로부터 ‘내 충성된 내 증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 앞에서 ‘내 충성된 내 증인’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도록 주의 이름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저버리는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힘쓰십시오. 그럼에도 믿음 없고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우리들이기에, 충성된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부어주시도록 은혜를 구하며 여러분에게 주어진 천로역정을 걸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