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성탄주일 2019 -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분의 영광

성탄주일 2019 -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분의 영광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성탄주일 2019 -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분의 영광

요한복음 1:14-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2-25

말씀내용
우리는 나이의 수 만큼이나 성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 의미와 아무 상관없이 성탄절을 보냈겠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의 참된 의미,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세상에 오신 일의 의미를 알아야 할만큼 충분히 알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주 오심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1. 신앙의 본질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 때에 당신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을 이 피조 세계에 육신을 입고 오게 하사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 한 때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보는 자로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육안으로만 보는 자들은 결코 그분 안에서 영광과 은혜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던 사도 요한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자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자가 없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도 없었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은 은혜의 기적입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14절과 18절에 각각 ‘본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능하신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삼위 하나님의 2위이신 성자이심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뵐 때, 성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모든 성품, 하신 일과 하시는 일들, 그리고 하실 일들로 인해서 즐거워합니다. 이점에서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2.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분의 영광을 본다.
우리가 먼저 보는 것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분을 보고 심지어 그분을 만져 보았습니다(요일 1:1). 이것은 단순히 인간 예수를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의 눈 앞에 있는 인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분의 영광을 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설명하는 성육신의 내용은 구약성경의 배경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심오한 내용입니다.
먼저, 14절에 ‘거하시매’라는 단어를 주목해 봅시다. 이 표현은 너무나 특별해서 구약의 배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비록 헬라어로 이 부분을 읽었을지라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기 사용된, ‘거하시매’라는 동사의 헬라어 어근은 skenow(스케노)라고 읽습니다. 이 말은 말그대로 ‘거주하다, 살다, 정착하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상응하는 구약 히브리어 발음이 흡사합니다. 히브리어로 ‘거주한다’는 뜻의 동사는 shakan(샤칸)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를 의미하는 성막을 의미하는 mishikan(미쉬칸)이 파생되었습니다. 단어의 자음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거의 일치합니다. 즉, 요한복음을 읽는 유대인들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 구약의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하시매’는 ‘장막을 치시매’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NASB 난외주), 이것은 매우 정확한 번역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의미를 구약의 성막과 비교하여 소개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장막을 치셨다’는 말은 임시적 거주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장막을 치고 살던 시절에 쓰이던 말이기에, 오늘날로 말하면 그냥 ‘거주한다,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잠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승천하셨지만, 주님은 임마누엘로 오셨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8:20).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장막에 비유하여 주님의 오심을 설명한 것일까요? 첫째는 구약의 성막이 상징하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그 성막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막의 실체가 오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7:15과 21:3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요한계시록 7:15, NKRV)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요한계시록 21:3, NKRV)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장면에서도 ‘장막’ 또는 ‘장막을 친다’고 표현됩니다. 주님은 잠깐이 아니라 영원히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계시려면 인간의 죄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번째 출애굽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이르자 곧 성막을 만들라고 모세에게 지시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이스라엘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제 성막의 실체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죄로부터,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죄의 결과인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제 주님은 성막의 실체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지만, 아직은 완전한 성취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죄 없으신 자로서 친히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하시매’와 관련된 의미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본문 14절에서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는 말을 연결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듭나서 눈을 뜬 사람들은 그들 중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쉐키나’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또는 광채를 가리키는 히브리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보이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을 본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가시적으로 당신의 임재를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신 경우가 있습니다. 출 40:34~36을 보겠습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출애굽기 40:34–35, NKRV)
성막이 완성되자,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된 하나님의 영광, 임재, 광채를 쉐키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쉐키나는 성막(미쉬칸)이란 단어가 파생된 ‘거주한다’는 단어 ‘샤칸’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그 쉐키나의 모든 상징은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은 구약 쉐키나의 성취이자 실체이며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신약의 본문이 고린도후서 4:6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NKRV)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바로 이 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그 실체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했습니다(골 1:15). 그래서 본문은 구약의 성막과 거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배경으로 주님의 성육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말씀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라고 말입니다(요 12:45). 빌립에게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라고 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요 14:9).


3.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영광
본문은 우리를 조금 더 데리고 갑니다. 그 영광을 보니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습니다(14). 17절에도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가 왔다고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이 본문은 독자들을 출애굽기 33, 34장으로 인도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던 그 유명한 본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자(출 33:18),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으므로 등만 보이시겠다고 하십니다(출 33:20~23). 그리고 ‘내 모든 선한 것’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출 33:19). 즉,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신 성품(all my goodness)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은 하나님이 모세 앞으로 지나시면서 선포하신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출 34:6~7). 여기서 핵심은, 맨 마지막에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14). ‘인자와 진실’은 ‘은혜와 진리’와 같은 말씀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인자와 진실’입니다. 가령, 시편 25:10에는,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인자와 진리’는 짝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합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즉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헤세드’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히브리어로 ‘에메트’인데, 이것은 진리, 진실, 성실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성품으로 이해하자면, ‘틀림없음, 분명하고 정확함, 확고부동함, 성실함’이란 뜻입니다. 진리(진실)는 앞에 나온 인자(헤세드)가 얼마나 참되고 불변하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문구를 ‘참으로 은혜가 넘치도록 충만하더라’고 해석하였는데, 통찰력 있는 해석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6절은 우리가 다 그 영광의 충만한 상태로부터 받는다고 말씀하는데, 무엇을 받습니까? 은혜 위에 은혜를 받습니다. 특이한 표현입니다. The Message는 이것을 ‘gift after gift after gift’라고 번역했는데, 많이 와 닿는 표현입니다. 넘치는 은혜를 받고 또 받고 또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b)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 은혜가 아니면 한 시도 살지 못하는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은혜를 입어 주를 보게 된 자들은, 그의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봅니다. 그리고 은혜 위에 은혜를 받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충만한 상태로부터, 그분의 한없는 인자와 성실하심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또 받으며 살아갑니다. 16절의 뉘앙스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수고를 해야 물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깊은 샘에서 물이 밖으로 솟아올라서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그 물을 넘치게 마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옆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4. 교훈과 적용
이것이 성탄절의 의미이고 우리가 성탄절에 받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누리고 맛보고 살기 위해 두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먼저, 예수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삶입니다. 사람만 보면, 신앙생활에서 시험을 받고 어려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야에서 그리스도를 놓치고 사람만을 볼 때 시험에 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2, NKRV)
우리 믿음의 근원이고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NIV는 ‘우리 눈을 예수께 고정하자’(Let us fix our eyes on Jesus)라고 잘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여러분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시켜 놓기만 하면, 그분을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건짐을 받을 것이며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는 성화의 과정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만큼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고린도후서 3:18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NKRV)
우리는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의 영광을 볼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그와 같은 성품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비천한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말입니다. 창조주께서 세상의 온갖 비천함과 낮아짐을 다 맛보셨습니다. 조롱과 비난 그리고 침뱉음과 수치를 받으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을 마지못해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영광스럽게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감당하시는 주님은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셨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를 비천하고 영 죽을 자리에서 건져내시려 하셨고,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을 주님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천함을 영광스럽게 받으셨습니다. 질고를 지셨으나 기쁨으로 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지심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히브리서 12:2을 인용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NKRV)
눈먼 우리 삶에 주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은 눈을 뜨고 그분의 영광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를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게 하시고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장막을 치고 거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로 나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런 분리가 명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가시적으로 나타난 쉐키나의 영광과 임재의 완성—을 보는 자는 살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보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인자와 진리를 보십니까? 그래서 그 안에서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십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를 더욱 누리고 살아가시기를 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우리 가운데 거하러 오신 분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면, 본 적이 없다면, 그 영광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를 보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 볼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은혜를 누리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자를 주께서 결코 물리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가 충만하신 우리 주님께 홀로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은혜를 누리고 누리고 또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