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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5). 환난 중에도 신실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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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5). 환난 중에도 신실한 교회

요한계시록 2:8-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2-22

말씀내용
고난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는 선명한 거울이 되곤 합니다. 튤리안 차비진의 말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믿지 않고 있는지를 자각하고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삶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영광스러운 고난』p.172)
오늘 본문은 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만 받은 두 교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는 남달리 고난이 심했던 교회였습니다. 본문 9-10절에서 보게 되는 ‘환난, 궁핍, 비방, 고난, 옥에 던져짐, 환난, 죽도록’과 같은 단어들이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신실함을 잘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상황에서 과연 믿음의 신실함을 지키고 살아갑니까?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과연 무엇입니까?


1. 서머나 교회의 환난 (9, 벧전 4:12-14; 고전 12:3; 행 13:45,50; 14:5; 9:5; 롬 2:28; 요 8:44; 계 3:17; 눅 12:21; 고후 6:10; 약 1:25)
먼저 1세기 말, 서머나의 상황과 그곳의 교회가 직면했던 환난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도 “내가 알거니와”라고 하시는데, 그 아시는 것은, ‘네 환난과 궁핍’입니다. 또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아십니다. 서머나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주님은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겪는 고난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고난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서머나 성도들은 이미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이 말씀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얻었겠지만, 주께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실로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영광스럽다고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안다고 지목하여 말씀하신 환난은 무엇이었을까요? 서머나는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가 소재한 도시 중 유일하게 21세기에 현존하는 도시입니다. 현대의 이름은 이즈미르입니다. 항구 도시인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56km정도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면 무역항인 서머나가 나오는데, 이 도시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했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했으며, 서머나가 아시아(소아시아) 최고 도시라고 여기는 시민들의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로마 제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은 황제 숭배에서는 에베소와 경쟁을 벌일 정도로 열광적이었고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서머나는 주전 195년에 아시아 최초로 로마 여신의 신전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특이점은 이곳에 유대인의 대규모 거류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 내에서 용인되는 소수 종교로서 유대교에는 그다지 문제가 발생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선교의 상황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졌기에, 유대교의 우산 아래서 어느 정도는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박해 이후, 점차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가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시기(81-96)에 황제 숭배 촉구령이 발표되는데, 이때 유대교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박해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황제를 신이 아닌, 통치자인 왕으로서 인정하고 제물을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 신자들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황제 숭배가 노골적으로 시작되기는 전이었지만,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연중 행사로 거행되는 황제 숭배 의식에서 “카이사르가 나의 주시다”라고 고백해야 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와중에 배교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도 그렇고 초기의 기독교 선교는 주로 유대교 회당을 중심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루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혈통적 유대인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이방인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기독교 선교를 통해 다시 기독교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분개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초기부터 유대인들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극심한 반대 세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추겨 할 수만 있으면 관리들과 결탁하여 기독교 박해의 선봉에 섰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사도행전에서도 확인이 됩니다(행 13:45,50; 14:5). 교회는 우로는 유대인들, 좌로는 관리들과 이방인들에게 둘러 쌓여 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특히 서머나에 대규모 유대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서머나 교회가 겪어야 했던 환난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더 극심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네 환난을 아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이런 상황 속에서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내가 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환난은 구체적으로 궁핍과 비방이었습니다. 궁핍은 단순한 가난이라기 보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머나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였지만, 서머나의 성도들은 그 부유한 도시에서 극심한 가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왜 궁핍한 상황에 처했는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그들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유대인들의 모함과 비방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9절 뒤에서 말하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입니다. 황제 숭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이교 도시에서 정상적 경제 생활을 포기했다는 의미였기에, 유대인의 비방은 여기에 더해진 환난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이방인 폭도들이 그리스도인의 소유물(주택이나 소유)들을 파괴하는 행위들, 일터에서의 따돌림, 실직 등 많은 위기들이 서머나의 성도들을 궁핍으로 몰아가는 요인들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일곱 교회 중 유독 서머나 교회에게만 궁핍을 언급했다는 점은, 서머나 교회가 겪던 경제적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더 짐작해 보게 합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비방’이라는 단어는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이 단어를 사용신 것은, “너희를 향한 비방은 곧 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심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행 9:5).
사실, 이 말씀들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우리는 고난이야말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경험하는 가장 복된 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슬픔이 아니라 특권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그것은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한 바,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롬 2:28). 주님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유대인들을 대면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요 8:44).
이것이 주님이 아시는 서머나 성도들이 겪는 환난, 즉 궁핍과 비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이렇게 심하게 비난하시는 주님은, 서머나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찢어지는 가난으로 허덕이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사실 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난처한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여러분은 어느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요한 삶입니까, 아니면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영적으로 가난한 삶입니까? 왜 제가 이 질문을 ‘난처한’ 질문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부요하게 사는 것이 여러분에게 중요한 만큼 이 질문은 난처하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두 주일 전에 “부자되기 대 사랑하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부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성도들은 이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아는데, 너희는 사실 부요한 자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삶의 자리를 마련하여 주십니다. 우리 중에는 경제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고 궁핍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요하든 궁핍하든, 그리고 설령 서머나 성도들처럼 궁핍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영적으로 부요한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전형적 특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b).” 야고보서의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1:25).”
우리는 서머나 성도들이 겪고 살아가던 그 궁핍의 자리는 사실 그들이 영적 부요함을 경험하는 은혜의 자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궁핍한 자기 백성에게 영적 부요함의 은혜로 갚으시고 위로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 말씀은 환난과 궁핍과 비방 가운데 살아가는 서머나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2.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8, 계 1:17b-18)
여기서 우리는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8절입니다.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서머나는 그 시민들에게 아시아의 첫째 가는 도시라는 자랑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첫째는 주님 자신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십니다. 조금 뒤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마는, 서머나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을 직면하고 살아가던 자들입니다. 주님은 시작일 뿐 아니라, 끝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1:17 하반절부터 18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런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끝을 주장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특별히 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성도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이 권세로써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는 사탄을 결박하시고 사탄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유대인들의 비방과 교회에 대한 박해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과 때로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고,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서머나 성도들에게 진정한 위로의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3. 장래의 고난 (10a; 단 1:12-15)
좀 더 나아가 보지요. 10절 상반절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자, 이 말씀을 읽은 여러분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장래의 번영을, 성공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서머나 성도들은 환난 가운데 있고 궁핍과 비방을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장차 받을 고난이 또 있다고 하시고, 장차 너희 중 몇 사람은 투옥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로마 제국에서 투옥은 전형적으로 재판과 처형의 전조였습니다. 즉, 이 말씀에서 투옥은 죽음에 던져 지기 위해 투옥되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장차 이런 일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으로 그 마음을 굳게 해주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장래에 받을 고난과 투옥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장래의 고난이 남아있지만, 또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혹독한 것이겠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데 이 말씀의 초점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셨고 역사의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성도들 몇을 옥에 던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들은 분명히 로마 제국의 관리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마귀가’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배후에 있다는 것은 이것이 영적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반역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주권적 계획을 성취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역사관입니다. 세상이 미국 대통령이나 북한의 독재자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의 지도자 손에 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은 언제나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성도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환난 중에, 장래 받을 고난의 예고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마음에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주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는 시험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험은 주님의 손에 있을 뿐 아니라, 결국 교회를 순전하게 하는 주님의 처방이 될 것입니다. 박해를 통해 교회에서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점에서 환난은 종종 교회를 향한 효과적 시험대가 되곤 합니다. 주님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언급된 ‘십 일’은 다니엘 1장에서 온 표현이라는데 학자들은 거의 동의합니다. 바벨론에 인질로 잡혀간 귀족 소년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소년들은 3년 간의 훈련을 거쳐 바벨론 왕의 신하들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나오는 진미를 먹음으로써 자신들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채식을 택하겠다고 뜻을 정합니다. 왕의 진미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관리하는 환관장에게 지혜롭게 구합니다. 하지만 이 소년들이 잘 먹지 못해 얼굴이 초췌해지기라도 하면 자기에게 불똥이 튈 것을 아는 환관장이 허락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다니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 1:12-15).”
다니엘의 말에 ‘열흘’이 세 번 나옵니다. 그것은 시험, 테스트의 기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십 일 동안’이 그것을 생각하도록 의도된 말씀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앞의 강해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이 얼마나 많은 구약성경을 사용하고 있는지, 특별히 다니엘서와 얼마나 많은 연결점을 가지는지를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이 ‘십 일’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문제는 길다, 짧다가 아니라, 이 기간이 정해진 기간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을 정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4. 신실함이 열쇠다 (10b-11)
주님은 10절 하반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은 신실해야 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종종 쉬지 말고 죽을 정도로 열심히 봉사하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합니다. 서머나 성도들 중 몇 사람이 투옥되면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결국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신실해야 합니다. ‘충성’이란 말은 믿음을 지켜라, 믿음에 부합하게 신실하라는 뜻입니다. 고난이 극심할 때, 충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온갖 타협의 유혹을 직면하게 됩니다. 쉬운 길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하지도 말고 끝까지 신실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도 주님 자신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신실함은 성도를 미워하는 불경건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핵심 특징입니다. 주님은 신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때 좋은 순간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고 성취와 부를 이루었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판단하는 분은 주님이시고 주님의 척도는 성공 보다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은 믿음에 부합하게 생각하고 가치 판단을 하고 그 길을 걸어가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5. 신실한 자들이 누릴 영예 (10b-11)
이제 일곱 교회 모두에게 말씀하셨듯이,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과 영예를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먼저 생명의 관입니다. 영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약속이지요? 그들이 받는 환난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영생을 누릴 것을 약속하십니다. 세상이 다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은 영원히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충성, 그 신실함에 비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생명의 관은 너무나 크고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함입니다. ‘관’은 왕이 쓰는 면류관부터 고대 올림픽경기에서 각 종목의 우승자들에게 씌워주던 월계수 관까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영광과 영예를 드러냅니다. 단순히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너희가 받은 환난과 궁핍과 비방과 투옥과 순교에 대해서 그 이상의 영예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11절 하반절에,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장차 임할 죽음의 위협 앞에 선 서머나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성경은 둘째 사망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12-15에서 우리는 둘째 사망의 의미를 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을 당한 모든 자들을 다시 살게 하신 뒤에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영벌에 처해질 자들을 하나님은 영원한 불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들이 비록 첫째 사망에 이를지라도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을 보증하십니다. 오히려 영예의 관, 영생의 관을 쓰고 천상의 승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말입니까? 끝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한 자들이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뒤, 약 60년이 좀 더 지나고 있을 때, 정말 큰 환난이 서머나의 성도들에게 임했습니다. 황제 숭배의 압박은 거세게 교회를 몰아쳤습니다. 당시 서머나의 감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었습니다. 관리들은 이 연로한 감독을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회유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유명한 고백으로 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그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함을 지켰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자리에 처해있든지, 그리고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환난과 궁핍과 비방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가리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장래에 어떤 일을 만나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함을 지키십시오. 믿음을 살짝 타협하고 쉬운 길을 가고 싶은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십시오.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관을 쓰게 될 영예로운 날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에서 마귀가 우리에게 환난과 투옥과 죽음을 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키신 바가 되었고,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을 자들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 가운데 아직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그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죄로 말미암아 피할 수 없게 된 둘째 사망에서 여러분을 건져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요, 주님이 되어주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