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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2). 사랑이 식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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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2). 사랑이 식으면

요한계시록 2:4-5, 욥기 1: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10-20

말씀내용
주님께서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의무 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설명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는 부부의 관계를 말한 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부부관계에서 사랑이 식으면 의무만 남습니다. 의무만 남은 부부의 삶에 전과 같은 기쁨과 행복함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언약이 주는 의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시 관계의 회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아.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결론 밖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부 관계는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처음 사랑은 서로에게 친밀함과 신뢰와 기쁨과 행복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친밀함도, 신뢰도, 기쁨과 행복함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의무만이 남게 됩니다. 에베소교회가 가진 주님과의 관계가 이러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의무를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 하지만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을 드러냈습니다(계 2:2).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버렸다’는 말은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포기했고 사랑하기를 그친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목사, 가디너 스프링(Gardiner Spring)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은 회심한 마음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에베소교회는 참된 교회로서의 정체성의 가장 강력한 증거를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신 말씀은, 에베소교회가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기를 그쳤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주님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가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좋은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주님께 대한 사랑 보다 더 나은 위치에 두었을지 모릅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 좋은 교회가 되겠다는 일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온다면,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제가 근사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아내가 제게 날마다 좋은 음식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아내에게 보답하려고 준비한 선물입니다. 저는 이렇게 저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이 말이 뭔가 꺼림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진정한 사랑입니까? 제 선물이 아내를 영화롭게 할 수 있었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런 것은 사랑도 아니며, 그런 선물은 제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서 비롯된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선물은 상대방을 기쁘게도 감동하게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의 훌륭함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기에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많은 성도들이 이런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점, 저런 점이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아닌지를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욥의 이야기에서 그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까닭(이유)가 있는가?
욥의 이야기로부터 주님께 대한 사랑의 참됨을 확인하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탄이 욥의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내용이 주님께 대한 성도의 사랑의 참됨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9-11).”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고 말합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드리는 신앙의 모든 행위가 함축된 표현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하는 데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욥이 자기 소유물에 복을 주시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말이 옳다면 욥의 신앙은 결국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 거짓 신앙일 것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 신앙, 우리 사랑의 순전함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까닭’이 있어서 믿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믿음, 욥의 사랑을 인정해 주십니다. 이기적 이유 없이 믿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결말은 사탄의 판단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떤 유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외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자녀들이 한 날에 다 죽고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버렸을 때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는 이 일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욥 1:22). 사탄이 한술 더 떠 욥의 몸을 치자 욥의 아내는 견디지 못하고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 만큼이나 욥의 아내도 자식들을 잃은 상실감과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슬픔과 고난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이도 모자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다 못한 욥의 아내는 믿음 좋은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했다고 해야 할까요? 후일, 욥은 그녀와의 결혼 생활 속에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더 낳고 손자 사대까지 볼 만큼 복된 노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줍니다(욥 42:13~17). 욥의 대답입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욥은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을 이용해 어떤 이득을 보려는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욥기 42장은 욥의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2~6).”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과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욥이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인정합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누린 혜택이나 우리가 겪은 고난에 상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주장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에는 근본적인 불만이나 근본적인 원망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욥의 아내가 한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지만 결국 욥과 함께 복된 노년을 보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신자도 때로는 불평과 원망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버릇과 성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원망과 불평의 문제를 심판과 직결되는 문제로 다룬다는 사실은(고전 10:10; 약 5:9; 유 1:15-16), 원망과 불평을 가볍게 취급할 수 합니다.


2. 주님께 대한 사랑은 자기애에 근거한 본능적 사랑이 아니다.
어떻게 이기적 사랑이 아닌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자기애에 익숙합니다. 그것은 본능적이고 본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본성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사랑이 자기애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의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는 번영 신학은 심히 위험하고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번영 신학은 사탄이 욥의 신앙에 대해서 말한 거짓 신앙을 대변할 뿐입니다.
본능적 사랑은 개가 자기를 잘 대해주는 주인을 좋아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배은망덕은 당연한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때론 본능적인 사랑이 거룩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사랑보다 더 뜨겁기도 합니다. 이기적 욕망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무관한 사랑이고, 그래서 이 사랑은 참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든든한 반석이 됩니다. 만일, 자기 필요를 채우는 것 외에 다른 관심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모양을 보일지라도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3.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가?
참된 사랑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도 참되고 깊다면 그(그녀)가 가진 조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향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은 점점 복음의 은혜를 입으면서 이기적인 이유들을 버리게 합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아름답고 탁월하다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합당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옳고 참되고 의롭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 점은 좋은데 저 점은 안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과 희열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자체가 탁월하기 때문에 생긴다. 성도가 느끼는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과 희열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성도에게 가져다 줄 어떤 유익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거룩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거나 묵상할 때 성도의 마음 속에 달콤한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위선자의 기쁨과 참된 성도의 기쁨의 원천이 다른 이유다. 위선자는 자기를 즐거워한다. 자아가 기쁨의 가장 주된 기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위선자의 마음은 우선 자신의 특권과 자신이 누리거나 누릴 행복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자아가 기쁨의 가장 주된 기초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우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영광스럽고 사랑할만한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모든 기쁨의 원천이며, 성도가 가진 모든 즐거움의 정수다. (『신앙감정론』 p.359)
욥이 보여준 경건과 신앙,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잘 묘사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 여러분의 사랑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4.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과 본성적 탁월하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탁월하심 혹은 아름다움 자체에 끌려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잘 알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너무나 작은 지식을 가지고도, 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된 사람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하나님을 더 알기를 소원하는 갈망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중생으로 시작된 주님을 향한 사랑은 이기적 자기애를 넘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한 사랑으로 그 안에서 자라갑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미 자연인의 본성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은 하나님께서 도덕적 행위자로서 발휘하시는 속성들 가운데 있는데, 선하심, 의로우심, 사랑, 진실하심, 신실하심 등을 가리킵니다. 이런 속성들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이라고 했고, 그 총체는 거룩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적 탁월하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적 탁월하심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능력과 관련된 속성들, 가령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심, 영원하심, 편재하심 그리고 위엄과 같은 속성들 안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본성적 탁월하심과 도덕적 탁월하심은 구분은 가능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도덕적 탁월성이 없는 본성적 탁월하심만 가지고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스러울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본성적 탁월성이 도덕적 탁월성과 함께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본성을 지니게 된 사람들은 비로서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인 거룩을 보고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된 까닭에 신자는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자연인은 얼마든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적 탁월성들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기만 하다면 그것이 곧 선이고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내 병을 고치시고, 날 부유하게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고 좋아 보이는 것은 굳이 참된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본능적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중생한 신자는 점점 더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과 영광을 알아가면서 자기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5. 욥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 욥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
우리는 여기서 욥의 신앙에 대한 일단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욥은 사탄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집과 소유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고난의 초기에 고백한 대로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비록 고난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에 대한 욥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그의 신뢰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욥 13:15 현대인의 성경). 욥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 속에서, 모든 것이 다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식들 보다, 잃어버린 모든 재물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은 삶을 살아오는 가운데, 여러분의 뜻이 좌절되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일로 인해서,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접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겪는 고난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 대신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불시험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했습니다(벧전 1:8). 사탄은 이들의 신앙과 사랑도 고난이 닥치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깊고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느 기초 위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의 신앙이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는 이기적 생각에 기초한 본능적 사랑에 불과하다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름답고 탁월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자신 안에서 그 거룩함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 안에서 발견하는 거룩함과 경건함을 가장 고상한 가치로 여기게 되고 그런 사람에게 끌리고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감각, 참된 사랑입니다.


6. 에베소교회의 사랑, 우리의 사랑
주님은 에베소교회가 이것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유혹과 위험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도 에베소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릴 수 있고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식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리는 것, 사랑이 식는 일은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잡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혹시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사랑이 식었고 의무만이 남았습니까? 모든 훌륭하고 옳은 신앙의 가치들을 다 지키고 살아가고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일지라도, 만일 처음 사랑을 버렸다면, 그 사랑이 식어졌다면, 거기에는 힘겨운 의무 외에, 신자가 누릴 기쁨과 즐거움, 주님으로 인해 누릴 행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심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라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종교적 의무감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주님으로 인해 누리는 행복을 알고 누리며 살아가십니까?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까?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합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나오십시오. 그리스도께로, 그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내가 처음 알았던 그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내 심령에 불붙는 사랑을 회복시켜 달라고 은혜를 간청하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