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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9). 교회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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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9). 교회의 비밀

요한계시록 1:17-20, 다니엘 10:6, 시편 67: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9-29

말씀내용
우리는 요한이 본 첫번째 그리스도 환상을 계속 상고하고 있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이 1:9-20에 기록되었는데, 오늘은 17-20절을 상고함으로 이 본문을 마치려고 합니다.


1. 흔들리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영광의 주님을 보라.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요한은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뵈었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았던 1세기 말의 독자들은 요한의 이런 현상을 읽으면서 힘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환상은, 예수님은 비록 성육신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광 중에 계시며 무한 불변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1세기의 성도들은 분명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님은 농담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택자들(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대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대위임령 또는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리는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제자들 그리고 교회가 주님께서 주신 이 위임령을 순종하려면, 많은 대가를 지불할 것은 분명했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주님께 속한 고로 주님을 미워하듯이 그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40일이 지난 오순절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작은 무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을 때부터 대규모 회심의 열매가 맺혀졌지만 동시에 박해도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일에 수반되는 핍박과 고난의 상황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위임령에 대한 순종은 오늘날 선교사로 부름 받고 먼 타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다가 주 앞에 갈지라도, 이 명령은 모든 신자, 모든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며, 여기서 제외되는 신자나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물질과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믿음과 복음,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치러야 할 대가도 따라옵니다.
이렇게 살라고 명령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 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약속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말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명령과 약속을 우리가 부르듯이, 대위임령 혹은 지상명령이라고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당연히 주님의 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알았고 종종 되뇌이며 가슴 속에 새기곤 했을 것입니다. 네로 황제 때도 어려웠지만,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면서(81-96) 박해는 더 광범위해졌고 그 강도도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고난이 극심해지면서, 배교자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참된 신자들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과연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것이 맞나?” 하는 의문 또는, “과연 그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분은 과연 지금 교회에 함께 하시는가? 우리들 곁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는가?”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들의 믿음도 흔들리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매일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이 영광의 주님을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흔들리는 믿음 가운데 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주님은 역시 영광 중에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설득하는데 꼭 필요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에게 영광의 주님을 계시하여 보게 하신 것은, 1세기 말 성도들의 흔들리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2. 거룩하신 주님의 자비하심
영광의 주님을 뵈었을 때, 요한에게 임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 인간이 가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우리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가 밤새 수고했지만 아무 고기도 잡지 못한 상태로 주님을 뵈었을 때,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고 주님 앞에 다시 보였던 반응을 잘 압니다. 그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눅 5:8). 왜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이 경험, 이 만남에서 주님에게서 신성의 거룩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놀라운 영적 감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요한이 본 것은, 육신을 입으신 주님 안에서 신성의 어떤 면모를 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베드로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을 가다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서지만, 그 신성의 영광이 감추어 질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을 뵌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발 앞에서 죽은 자 같이 엎드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요한이 주님을 뵈었던 방식으로 주님을 뵐 수는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 영광을 보여주시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장차 여러분이 그 영광을 보기에 적합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한 처소를 마련하셨을 때,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가 성취되는 것을 행복하게 경험할 것입니다.”『스펄전설교전집: 요한계시록』 (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제6장, p.10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제한된 방식일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들의 인생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나타내고 보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그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이고 또 한 사람은 그와 동시대에 북미 인디언의 선교사로 살다가 2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입니다. 먼저 조나단 에드워즈의 체험입니다.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서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분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되심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히 컸습니다. 이 체험은 내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 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정이 소진되어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땅바닥에 엎드려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었습니다.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를 의지해 살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과 천국의 순수함으로 완전히 성화되고 순수하게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백금산 편역,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부흥과개혁사), p.180-181)
이번에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21살 때의 체험입니다.
“무력하고 망연자실해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리고 그 한적한 장소를 또 산보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침통한 우울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기도를 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기도나 어떤 다른 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이 아주 나를 떠나버리셨나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직 절망적 상태까지 빠져 있지는 않았다. 단지 천하에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여전히 울적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척 무미건조하고 변변찮은 기도였지만 반 시간 가량은 힘써 했다. 어둡고 울창한 숲 속을 걷고 있는 바로 그 때, 시야가 확 트이는 것 같더니,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이 나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것을 외적 광명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삼층천이나 그런 세계에 존재할 것 같은 어떤 발광체란 뜻도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한번도 이런 체험을 해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조금 비슷한 일조차 겪어보지 못했었다. 나는 경이로움과 탄복할 수 밖에 없는 그 영광에 압도당한 채 잠잠히 서 있었다. 이렇게 특이하고 아름다운 일에 비견할 만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하나님께 대해서도 성스러운 일에 대하여 내가 품어왔던 관념과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어느 한 위격에 대해서도 특별한 깨달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본 체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령한 영광처럼 느껴졌다. 이 빛나고 성스러우신 분, 하나님을 뵈온 듯 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영혼 속에 넘쳤다. 나는 영원히 우리 가운데 왕 노릇 하신 분을 뵈온 듯한 만족감으로 차 있었다. 하나님의 탁월하시고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또 완전무결하신 품에 내 영혼은 황홀히 안겨 있는 듯 했다. 나는 자신의 구원에 관한 생각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내가 피조물이란 사실까지 망각하고 있었다....
온 우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함이로구나! 이 내밀한 기쁨과 평화는 밤이 깊어 가도 감동 깊게 가슴 속에서 부풀고 있었다. 나는 저녁 시간에 내가 체험한 이 일을 검토해 보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날 저녁까지도 온통 내 마음을 차지하고 감미로움을 주었다. 내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있는 것 같았고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전에 해온 것들과는 전혀 판이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체험은, 요한의 체험과는 달리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체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런 은혜는 연약한 우리로 능히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이런 은혜는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을 떨쳐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겸손하고 간절하게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진 요한에게 주님은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른 손을 얹는다는 것은 거의 전문적인 관용어로서, 인정과 위로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미천한 존재인 인간을 향해 당신을 낮추시고 능력의 팔을 뻗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손으로 요한을 만지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오른손으로 주님은 요한의 본성의 연약함을 만져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얼마나 힘이 있고 권위있으며 자비하고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사 42:3) 주님의 자비한 말씀이 아닙니까? 이 자비한 말씀은, 주님의 신성의 거룩함 앞에서 거의 죽게 된 자의 영혼을 소성케 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의 자비하심을 봅니다.


3.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 (히 2:14-15)
이어서 주님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선언하십니다. 먼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17b). 우리는 앞서 8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선언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3번 나오는 이 표현은, 두 번은 성부 하나님께(1:8; 21:6), 한 번은 성자 하나님께(22:13)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는 말씀도 그 의미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역사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신 분은 성자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실로,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며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1:18a)”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성부 하나님께 돌려졌던 표현과 같은 패턴을 보게 됩니다. 4절에서 성부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순서와 달리, 시제가 현재-과거-미래의 순서로 표현된 점을 우리는 주목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중에 있던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현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현재를 유난히 강조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 드렸지요? 여기서도 같은 패턴입니다. ‘살아 있는 자’라는 표현은 현재시제이고,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표현은 과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라는 표현은 물론 미래에 속합니다. 여기서도 현재-과거-미래의 패턴을 따르는데, 같은 의도일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살았다는 개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서 다스리시며, 영원히 살아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성취와 그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메시지는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단순히 살아서 다스리실 뿐 아니라, 특별히 사망과 음부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통치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음부라는 말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전달되기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인데, 이것은 구약성경 히브리어에서 ‘스올’이라는 단어에 대한 헬라어 번역입니다. 하데스(헬)나 스올(히)은 모두 죽은 자의 사후 거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보통 하늘과 땅, 땅속의 3층 구조로 세상을 이해했는데, 땅속을 죽은 자들이 가는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음부는 종종 무덤이라고도 번역되는데, 우리의 무덤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며, 죽은 자들과 죽음의 영역 까지 다 주님의 통치권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믿음과 예수의 증거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산 자들의 땅과 살아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음부와 죽음의 영역도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그 열쇠를 가지고 계시므로,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죽을 수 없고, 우리의 생사는 로마 황제나 로마의 총독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살았든지 죽었든지 주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할지라도,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죽이셨고 그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Happy Birthday 만이 아니라 Happy Deathday 도 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임종의 순간은 생애 최고의 순간입니다. 주께서 사망의 문을 열어 우리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그 사망의 문턱을 넘어 사랑하는 구주의 품에 안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고백을 소개하고 싶은데, 한 사람은 아까 소개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이고 또 한 사람은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 1949~)입니다. 먼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입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뵈옵는 것이다. 오, 나의 약하고 지친 영혼이 내 아버지 집에 도착할 날을 갈망하나이다!”(1742년 6월 12일)

이것은 그가 24살에 쓴 일기입니다. 2년 후인 26살에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썩어 부패한 답답한 이 육신을 벗어나서 하나님만 영원토록 섬기면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죽음이 더욱 그리워졌다.
아 짐스런 이 삶이여,
죽음이여,
죽음이여,
나의 좋은 벗이여.
이 사망의 늪에 빠진 나를 구하라.
나로 거룩하고 활기 넘치는 나라에 거하게 하라.”(1744년 10월 30일)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나 그가 29세의 나이로 임종하기 이십 여일 전,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영화를 누리자고 하늘 나라에 가는게 아냐. 모든 영광과 찬미를 하나님께 올리기 위해서 가는 거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중에, 이곳에서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얼마나 갈망해왔던가. 만일 하나님께서 영광만 받으신다면 나는 영생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고, 육신적인 고통쯤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무덤이 참으로 안락하게 느껴졌다. 나의 곤고한 뼈를 그곳에 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해…”(1747년 9월 19일)

두번째로는 17세에 사고로 목이 부러져 어깨 아래 전신 마비로 지금까지 52년 간 불구의 몸으로 저술과 강연을 하고 있는 조니 에릭슨 타다의 짧은 고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육체를 얻는 것이 나의 관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죄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의로움으로 옷 입게 될 날이 기다려져서 안달이 날 지경입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천국이 주는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들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4. 교회의 비밀
주님은 이어서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명하셨습니다(1:19). 이 19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네가 본 것’은 1장에 설명한 바 그리스도 환상이고, ‘지금 있는 일’은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며, ‘장차 될 일’은 4장 이하 22장까지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 바른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시간표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가 본 것’은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가리키고, ‘지금 있는 일’은 교회 시대 전체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며, ‘장차 될 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 기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망라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21세기 한국교회의 일원인 우리 모두에게도 적실성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후자의 관점이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강해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끝으로 이 환상을 정리하며 해석해 주시는데, 그것이 20절입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20).”
요한은 지금까지 엄청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의 주요 내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환상이 요한이나 1세기 말의 성도들 그리고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가장 중요한 것을 풀어 주시려고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여기 ‘비밀’은 헬라어로 ‘뮈스테리온’이라는 단어인데 여기서 신비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mystery 가 파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원 의미는 영어 mystery가 의미하는 바,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가르쳐주면 알지만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거나 알기 어려운 ‘비밀(secret)’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하셨는데, 의미 상으로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습니다. 헬라어 문법으로는 ‘일곱 별의 비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곱 금 촛대의 비밀도 알려주신다는 점에서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인 것입니다.
비밀은 주님이 오른손에 붙잡고 계시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입니다. 20절 하반절이 비밀을 풀어주는 내용입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이 설명이 없었다면, 요한은 어떻게 자신이 본 이 환상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 비밀은 단지, “일곱 별 = 일곱 교회의 사자” 그리고 “일곱 금 촛대 = 일곱 교회” 라는 설명이 아닙니다. 이것을 앎으로써 요한계시록의 독자인 성도들은 교회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보잘것없는 목회자들의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눈에 아무리 유능한 목회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사람일 뿐입니다. 로마 제국의 강력한 권세 앞에서 무력해보이는 교회와 그들의 지도자들을 붙들고 계시는 전능하신 주님, 지금도 그 오른 손에 목회자들을 단단히 붙잡고 계시는,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성도들은 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그들의 인간 지도자들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교회를 염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일곱 금 촛대로 대표되는 일곱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주님은 모든 교회 가운데 임재 하고 계시며 그들 교회 사이 사이를 거닐고 계시고, 그들을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그들 가운데 임재 하시는 주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교회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제국의 박해 앞에 무력해 보입니다. 교회는 언제라도 무너지고 사라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견고합니다.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의 목회자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그들 교회 가운데를 거니시며 임재 하시며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두려워할 이유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영광 중에 계시는 당신을 요한에게 보이심으로써, 요한 자신과 두려워하는 교회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두려워하지 말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며,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 계십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그리고 죽음도 우리를 삼킬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롬 8:35-36). 그러니 신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게 합니까?
가난이 두렵습니까? 만물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부유하신데 왜 신자가 가난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고치지 못할 심한 질병이 두렵습니까? 주님은 “내가 그를 병상에서 붙들겠다(시 41:3).”고 말씀하시는데, 왜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죽음조차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믿는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교회를 향하여 염려나 두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전반적인 타락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성공과 물질을 우상 숭배하듯 섬기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보다 자기들의 성공과 권력과 금력의 세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의 법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교회들을 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잃어버릴 부와 힘을 두려워하는 교회들을 봅니다. 염려와 절망의 그림자가 교회 위에 드리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십시오. 참되고 신실한 종들을 당신의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보십시오. 교회는 칠흑같이 깊어만 가던 중세의 어둠을 뚫고 복음의 빛을 찬연히 발하며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그 시대에 교회의 설교자들, 목회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을 당신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영광스럽게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 가운데 계셨고 임재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를 붙들고 계시며, 우리의 죽음까지도 다스리시고 결정하시는 그분 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