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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 환난과 나라와 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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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 환난과 나라와 참음

요한계시록 1:9-11, 요한복음 16:33, 사도행전 14: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9-08

말씀내용
요한계시록은 1:1-8에서 문안 인사에 해당하는 프롤로그가 끝나고 요한이 본 첫번째 환상—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이 본 첫번째 환상은 1:9-2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상의 핵심은 영광을 받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은 환상의 서론인 1:9-11을 살펴볼텐데, 이 계시 환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로부터 누구에게 누구를 향하여 주어진 것인지를 밝혀줍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1세기 말의 1차적 독자들(혹은 청자들)은 요한이 받은 계시가 천상의 권위를 지닌 것임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이 살아계신 주의 말씀이 성령 안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배교의 위험에 처한 고난 받는 성도들
우리가 아는대로 1세기 말의 교회는 배교의 위협에 처해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에 고난이 다가오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어려움이 가중되어오자 교회는 흔들렸고, 많은 사람의 마음이 배교의 유혹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배교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생존하는 사도인 요한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이 사도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교회를 독려하고 배교의 유혹에 직면하여 살아가는 연약한 교우들에게 무엇을 말하였겠습니까? “그래도 힘을 내세요.”라는 말은 그들에게 얼마나 힘이 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혹은 “조금만 더 견디면 주님께서 좋은 날을 주실거예요.”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절대로 힘을 잃지 마세요”라는 말은 얼마나 의미가 있었을까요? 사도는 배교의 위험을 느끼는 성도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하거나 주도면밀한 신학적 논리를 펼침으로써 그들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영광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원한 통치를 보여줌으로써 지금 당장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된다면, 배교라는 어리석은 선택과 결정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배교의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증거함을 인하여 당해야 하는 모든 고난을 영광스럽게 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당신 자신을 환상 가운데서 요한에게 보이시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위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요한이 본 이 위대한 환상-계시는 요한 자신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신앙으로 인하여 고난 당하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은혜였습니다. 종종 우리는 어떤 체험을 자랑하는 경우, 혹은 그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인하여 교만하게 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모든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 체험을 주시는 의도를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의 한 지체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롭게 하고 세우시는 방편으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일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문제로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이 위대한 환상-계시를 요한에게 보여주신 목적은 배교의 위험에 처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 환난 가운데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가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배교의 위험에 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보다 더 효력 있는 위로와 힘은 없습니다.


2. 참된 영적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또 하나의 주제는, 참된 영적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만 28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교회들을 다니며 설교를 할 때마다, 나이가 어리다는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나이와 상관이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참된 영적 권위는 나이와 직접적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가 많고 경륜이 쌓이면 영적 권위도 자동적으로 함께 있는게 아닙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은 일찍 목사로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다가 29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청년 목사가 목회를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영적 권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참된 영적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당시 생존하는 유일한 노사도였습니다. 지구 상에 그 외에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 행적을 보았고 그 말씀을 지근거리에서 직접 배웠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사도됨을 내세울 수 있었고, 경륜이나 나이로도 나 같은 사람이 있느냐는 식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차별성을 내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차별성에서 참된 영적 권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환상-계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차별성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사도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9절을 봅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불리한 말이 아닐까요? 차별성은 커녕, 사도는 자신이 그들의 형제이며, 성도들 모두가 받고 있는 환난, 나라,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권위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리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참된 영적 권위는 자신을 차별화하는데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언제나 주님 자신으로부터 옵니다. 자신을 아무리 차별화시킨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교회 직분자들의 권위는 어디서 옵니까? ‘성도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표를 얻었는가’가 아닙니다. 직분의 권위는 주님께서 그 직분을 세우셨다는데서 옵니다. 그리고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뜻을 따라 그 직분을 행사하는데서 영적 권위는 나옵니다. 모든 참된 영적 권위는 사람이 가진 나이, 권력, 포지션, 학벌,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사도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자신을 형제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차별적인 점을 내세우거나 무게를 잡는데서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알 때, 이런 자연스러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 내가 성령님 안에 있던 어느 주일에 위엄에 찬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영화롭고 높아지신 모습을 환상 가운데 봤다. 그분께서 일곱 교회에 보는 것을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셨다.” 권위는 여기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그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권위를 인하여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그 권위 아래 엎으려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계시가 주어진 구체적 정황
구체적으로 이 환상-계시가 어떻게 요한에게 주어졌는지를 봅시다. 8절 하반절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밧모 섬으로 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으로 인하여 밧모 섬으로 유배되어 간 것입니다. 밧모 섬은 소아시아(오늘의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위치한 에게해의 섬으로,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져 있는 완도의 절반이 못 되는 작은 섬입니다. 이 섬은 화산으로 생성된 섬인데, 겨우 포도와 밀이 조금 재배될 뿐 대부분의 땅은 돌과 바위가 덮인 불모지라고 합니다. 4세기의 유대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 때 사도 요한이 18개월 동안 이 섬에 유배되어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노역을 했다고 합니다. 90대에 이른 노사도가 감당해야 했을 노역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96년에 사도는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귀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사도는 채석장에서 노역을 감당하던 어느 주일, 이 환상-계시를 받게 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주의 날’은 주일입니다. 사도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던 중에 환상-계시를 받은 것일까요? 사실 주일에 쉬는 개념이 없던 당시에, 유배를 와서 노동을 해야 하는 사도가 주일에 쉬면서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주의 날에 일어났습니다.
‘성령에 감동되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 4번 나오는데(4:2; 17:3; 21:10), 이것은 무아경이나 황홀경에 이른 상태를 말하기 보다는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지정의가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윌리엄 스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들을 통찰할 수 있는 성숙한 차원의 영적 감응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때 어떤 방식으로 계시가 임했습니까? 사도는 먼저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1:10).” 이것은 나팔 소리가 아니라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요한이 구약 선지자들의 반열에 있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었던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9:16은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겔 3:12). 이 소리는 그리스도 환상의 배경음악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그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계 1:11).” 그것은 먼저, 기록하라는 주님 자신의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적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당시의 방식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을 기록했다면, 그것은 7m 정도 되는 길이가 나왔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노사도는 요한계시록을 한가한 형편이 아닌, 채석장 노역의 한 가운데서 썼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록된 것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십니다. 전에도 잠깐 설명드렸지만, 일곱 교회의 소재지는 소아시아의 내부순환도로를 따라 도착할 수 있는 주요 도시들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이 도시들은 에베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라오디게아까지 순환도로를 따라 갈 수 있는 도시들입니다.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는 이 도시들은 소아시아 중서부의 우편배달구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는 짧게는 48km에서 길게는 80km 정도가 됩니다.
이와 같이, 요한에게 환상-계시가 주어진 정황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입니다. 그가 들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권위의 열쇠입니다.


4.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이제 9절로 돌아와서, 사도 요한이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한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는 이미 ‘너희 형제’라고 쓰고 이어서 이렇게 씀으로써, 자신이 이 서신을 받게 될 일곱 교회의 성도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동료 형제일 뿐 아니라, 그는 1세기 말의 성도들과 함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동참한다는 단어는 사귐을 의미하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함께 몫을 나누고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환난, 나라, 참음, 이 세 단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단어들의 나열은 ABA 패턴이라고 불립니다. 가운데 있는 나라를 중심으로 앞과 뒤에 동일한 개념을 두는 것입니다. F.F.브루스의 설명입니다.
“요한이 ‘나라’를 ‘환난’과 ‘참음’ 사이에 두는 것은 반복되고 있는 신약성경의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다.—환난의 참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다. 따라서 요한이 아시아 교회들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굳게 서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면, 그는 방관적 입장에서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전투에 참여하는 자로 격려하는 것이다.”
즉, 환난과 참음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라는 말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봅시다. 이 단어는 6절에서 이미 나온 단어입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나라는 왕권, 통치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 동참한다, 함께 참여한다는 말은 만왕의 왕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자로서 이 영광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즉 환난과 참음, 환난을 견디고 인내하는 것 뿐 아니라, 환난을 참는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일에도 성도들은 사도 요한과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 혹은 견딤으로도 번역되는 ‘참음’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는 이김의 과정입니다.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에게는’이라는 반복된 강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김의 과정에는 반드시 참음이 있습니다. 참음은 무력하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김이라는 궁극적 시점의 렌즈로 볼 때(이것이 요한계시록의 시각입니다), 참음은 이기는 과정입니다. 이런 왕권적 통치가 환난을 참음으로써 행사된다는 역설적 개념은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참고 죽으심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써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고난 속에 감춰진 방식으로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재림하셔야 그때부터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생각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환난과 참음 속에서 성도들은 나라(왕권)에 이미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환난을 참는 가운데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하다가 밧모 섬으로 유배를 오게 된 것입니다. 요한 만이 아니라, 배교의 위협과 유혹 아래 살아가는 1세기 말의 성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패키지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성도들을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환난과 참음으로써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왜 사도는 이렇게 복잡하게 쓰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 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환난과 참음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 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지금 고난을 피할 길을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한 해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난이 신자들을 빗겨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는 주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의 미움을 받기에 더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점에서 고난이란, 그레엄 골즈워디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이 겪어야 할 규범적인 경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과 참음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왕권과 다스림에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하지 말고, 끝까지 참음으로 이 길을 잘 걸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라고 사도는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주목해야 한다면,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예수의’환난과 나라와 참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왕권), 예수의 참음입니다. 여기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과 요한만 하나로 연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들이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고, 그의 나라에 동참하며, 그의 참음에도 동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 사도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것과 동질의 고난을 당하겠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격이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어떻게 썼습니까?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또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권면했습니까?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3,16).”


5. 교훈과 적용—성도의 고난은 현재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제 본문의 적용적 교훈을 살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환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도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언 때문에 오는 고난 뿐 아니라, 우리의 잘못과 연약함으로 빚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비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들 조차 다 용납하시고 우리로 그 고난을 참음으로써, 당신의 왕권적 통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왕권적 통치에 주님과 함께 참여하는 길은, 고난과 참음에 동참함으로써 입니다. 그렇다면, 고난과 참음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만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고 말씀했습니다(골 3:3). 성도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참음이 그들의 삶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들의 고난이 현재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 참된 지식 위에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서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환난을 끝까지 잘 견디어 예비된 영원한 복락을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1세기 말의 성도들과 함께 우리들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영광스럽게 이 길을 걸어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