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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 그리스도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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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 그리스도께 영광!

요한계시록 1:5-6, 요한계시록 5:11-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8-11

말씀내용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서문인 1-8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5절 하반절에서 6절에 이어지는 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기초하여 그분께 돌리는 송영의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4-5a)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의 문안을 전하면서, 은혜와 평강의 궁극적 원천이 성 삼위 하나님이심을 말했습니다. 요한은 단순히 성 삼위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세심하게 묘사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은 이런 성 삼위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마음에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금 독특하다고 느낀 것은, 요한이 서술하는 삼위 하나님의 순서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서술하는데 반해, 요한은 성부—성령—성자 하나님의 순서로 서술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을 마지막으로 묘사하면서,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그것은 바로 복음 그 자체입니다!!!) 이로 인하여 성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같습니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요한계시록을 써내려갈 때, 특별히 이 부분에서, 얼마나 이런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인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쓰다 보니 자기 자신이 감격하고 감동해서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성자 하나님께 송영을 돌리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가 해당된다고 보는 것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1. 초점—예수 그리스도
분명한 것은,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에서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사도 요한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일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그 작정을 실행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께서 실행하신 구속을 모든 택자들에게 효력 있게 적용해 주십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구원의 초점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했고(고전 2:2),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했습니다(갈 6:14).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사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서 하늘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몇 번의 송영이 나오는데, 5절 하반절과 6절이 그 첫번째 송영입니다. 첫번째 송영이 성자이신 그리스도께 돌려진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의 구속 사역은 곧 드러나게 될 종말론적 드라마의 중심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2. 요한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앞에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중에 요한의 마음은 아마 사랑하는 구주에 대한 마음으로 불타 올랐을 지 모릅니다. 아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었을까요?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을 때, 단순히 기계적 의미에서 성령께서 구술하여 주시는 것을 받아 쓴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쓰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받은 교육적 배경과 글을 쓰는 개성 등을 그대로 갖추고 그것을 드러내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5절 상반절에서 요한이 사랑했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할 때, 그의 마음이 불타오르지 않을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빌라도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충성된 증인으로서 선한 증거를 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충성된 증인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으로 자신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생각했으며, 뿐만 아니라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사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천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는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뿐입니까? 그는 승천하사 만왕의 왕, 임금들의 머리가 되사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분을 생각하면, 모든 풍파 속에서도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도 충만하게 경험되기를 요한은 바라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런 요한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 곧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는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요한은 성령께서 불러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냥 차분히 앉아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고 무릎을 꿇고 주 예수님을 찬미하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커다란 경건의 간헐천에서 갑작스럽게 물줄기가 위로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의 영은 한동안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 대한 그의 사랑이 갑자기 분수처럼 쏟아져 아주 높게 솟아올라 수정 같은 사랑의 물줄기가 반짝이며 하늘을 수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 조수가 점점 차오르는 것처럼 사랑의 감정이 점점 더 충만해지는 것을 보기 바랍니다.”
정말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찬송은 참된 믿음의 시금석이다.
요한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서술합니다.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사랑하사’와 ‘해방하시고’입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서 읽으면, ‘사랑하사’는 현재형으로, ‘해방하시고’는 부정과거라는 시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 시제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성격을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한번의 행위로 그치지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대신 받으셨습니다. 로마서 5:8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8:32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은 그 영원하고 항상 있는 사랑을 증명하는 단회적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써, 모든 택하신 백성의 죄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짊어지고 감당하셨고 도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라고 할 때, 해방하신 사건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고난 받는 당시의 교회 성도들이 지금도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고 그들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줄 필요가 있었기에, ‘사랑하사’라는 단어에 현재시제를 사용한 것입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속적인 실체로서, 갈보리에서의 구속 사역을 통해 어느 한 시점에 표현되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어떤 기대 같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영광의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확신은 이미 일어난 사건, 십자가의 사건에 근거합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힘있는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확신입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패니 크로스비가 작사한 찬송가 중에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가 있습니다. 그 후렴구가 이러합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그렇습니다. 갓난 아기 때 의사의 실수로 실명하여 평생을 맹인으로 살았던 그녀가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것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확신이 어떻게 표현이 됩니까?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찬송시를 쓴 패니 크로스비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고,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았으며, 분요한 세상과 온갖 생각, 상념들이 가득한 자신은 다 사라지고 구속한 주님만이 밝히 보이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확신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께 이런 송영을 돌리는 것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은, 막연한 가슴 속에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었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그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변함없고 지속적인 사랑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에게,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을 것으로 생각되는 분에게, 우리를 왕으로 삼으셨을 것으로 때때로 믿는 그분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찬송은 우리 영혼의 시금석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을 복음의 사실에 대한 지적 동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적 동의와 참된 신앙이 어디서 명료하게 갈리는지 아십니까? 바로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 말입니다. 물론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부를 때,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때에도 찬송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시금석인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지적 동의만으로는 가슴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찬송은 참된 신앙이 그 영혼 안에서 만들어내는 역사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받은 복을 아는 사람만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의 찬송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그리스도께 송영을 돌립니다. 이런 찬송은 참된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앞에서 이미 조금 설명드렸지만, 이제 우리는 사도 요한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 드리는 송영의 근거 또는 이유를 보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복음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것이 사도 요한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고 복음의 내용이며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는 이유입니다.
‘사랑하사’와 ‘해방하시고’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종으로 그 사슬에 묶여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피로 해방하여주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하신대로(히 9:22)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죄의 삯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 해방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이것 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19:6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삼개월이 되어 시내산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소위 시내산 언약이라고 일컬어질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전제에서 주시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인용한 바 있습니다(벧전 2:9). 이 말은 제사장적 요소와 왕적 요소 두 가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나라’라는 말은 사실 왕권, 또는 왕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지금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또한 제사장으로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는 두 가지 특권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으나(사 43:10-13)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이제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른 중보자 없이 스스로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로 죄의 장애물을 다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왕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문구 하나를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하셨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주님은 자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강조하셨습니다(요 5:30; 6:38-39).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42; 막 14:36; 눅 22:42).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라고 생각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작정을 실행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맺으신 구속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우리의 구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쓸 때 바로 이런 내용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하신 일이기에, 우리의 구원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언제나 이 시각, 이 관점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앞에서 말했듯이, 신앙이 지적 동의와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지식을 거부하거나 몰아내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타 오르듯 하는 것은, 단지 감정에서 시작해서 감정으로 폭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삼중적 묘사로 설명한 사도 요한은, 조금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고백합니다. 이것은 교리이고, 복음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사도와 함께 이런 송영을 그리스도께 돌리려 한다면, 혹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중에 그리스도께 드릴 영광의 찬송이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분을 찬송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누구시며,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제대로 그리고 점점 더 알아갈 때, 진정으로 우리의 가슴에서 그리스도께 올리는 영광과 찬송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게 될 영광스러운 천상의 예배의 광경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1-13).”
본문에서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하고 송축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이런 지식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스펄전의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어떤 존재를 모시고 있다면, 기대할 수 있는 만큼 뜨거운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성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품을 수 없습니다.”


5. 그리스도를 향해 불타오르는 가슴으로 송축하라.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사도 요한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문안을 전하다가, 그 모든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 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말할 때, 그 가슴에서 불타오르는 뜨거움을 느꼈고 그래서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는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그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 분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그 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여러분의 마음은 그분께 돌리는 찬송으로 가득해집니까?
사도 요한이 막연한 기대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찬송할 수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런 확신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심령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그런 확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단지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적 동의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찬송을 통하여 확인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슴의 찬송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신 일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행하심으로써 여러분이 누리게 된 은혜와 복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십니까? 신앙이 지적 동의일 수는 없지만, 지식이 없는 신앙은 또한 참된 신앙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 그 욕구가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그 욕구는 얼마나 큰가요?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고백합니다(빌 3:8,10).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합니까? 중요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보여주는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계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입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의 가슴 속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를 뜨겁게 찬송하는 찬송이 가득하게 하옵시고 그 찬송이 터져 나오는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