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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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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 1: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7-28

말씀내용
우리가 이제 살펴보려고 하는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실 요한이 받은 계시이기에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하였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계시 혹은 묵시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어 ἀποκάλυψις 라는 단어인데, 여기서 영어 apocalypse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은 계시나 묵시 또는 계시록이나 묵시록이라고 번역되고,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979년에 [지옥의 묵시록]이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pocalypse Now입니다. 이 영화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경험하는 공포와 광기, 그 지옥상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아마 이런 인류 최후의 모습으로서의 지옥상을 떠올려준다는 점에서 이런 제목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래 계시라는 말은 ‘베일을 벗긴다’는 뜻입니다. 1절에서 보듯이, 이 계시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계시의 주체 뿐 아니라 계시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대한 책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1절 하반절은 이 책의 기원과 전달에 관하여 좀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 계시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천사를 통하여 이 책의 기록자인 요한에게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독자는 요한이 아닙니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종들’입니다. ‘그 종들’은 교회의 사역자나 목사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3절에서 밝힌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한 이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바로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물론 21세기에 사는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펼쳐 보이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1절에서 하나 더 주목할 말이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계시입니다. 여기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읽기 쉽기만 한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기에, 사실은 어느 정도 주의력 깊은 아이들이라면 읽어 주기만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믿는 성도들이 이 계시록을 암호문서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학식이 많지 않은 보통 성도가 요한계시록을 읽은 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것입니다”라고 잘 대답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고 잘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 지나친 두려움도, 지나친 가벼움도 금물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다른 모든 성경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령의 조명하심과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언제 쓰여졌는가?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에 대해서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살펴볼 것은 요한계시록이 언제 쓰여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개의 주장이 있습니다.
먼저 19세기까지는 네로 통치(54-68년) 후기나 직후에 쓰여졌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것을 초기저작설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은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11장에 성전을 측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성전이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의 부대에 의해 무너진 것이 70년이니까 요한계시록은 그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17장에 나오는 일곱 머리, 일곱 산, 일곱 왕을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해서 보면, 여섯번째 왕이 네로인데, 그리고 이후의 갈바를 일곱번째 왕으로 해석합니다. 또 짐승의 수 곧 사람의 수인 666을 해석할 때, 히브리어의 자모에 숫자를 부여하는 게마트리아에 의하면 이것이 네로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이것들이 초기저작설의 주요 근거들입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학자들 대부분은 초기저작설보다 후기저작설에 더 무게를 두는 편입니다. 후기저작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때인 95년 경에 요한계시록이 쓰여졌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박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확실한데, 네로 때에도 박해는 있었지만 그것이 로마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림으로써 일어난 국지적 박해였다면,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흐름이 점차 강해지게 되었고 이 박해는 소아시아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교에는 예외적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고,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져서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고 결국 박해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후기저작설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수신자인 일곱 교회는 모두 이런 박해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후기저작설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2세기 교부 이레니우스의 증언입니다. 그는 사도 요한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환상을 보았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말년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고 썼습니다. 이레니우스가 서머나 감독이었던 폴리갑의 제자였고, 폴리갑이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레니우스의 증거는 사실상 후기저작설에 대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후기저작설에 무게를 두고 요한계시록 강해를 할 것입니다.


2. 누가 썼는가?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생각할 두번째 주제는 누가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1:1,2,4에서 저자(기록자)가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히고 있고, 1:9에서는 더 많은 단서를 제공해줍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분이 사도 요한을 가리킨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가 요한복음과의 신학적 차이와 헬라어 문체 등이 다르다는 근거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 전까지도 당연히 그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현대에도 이와 유사한 이유들로 사도 요한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2세기 초 에베소에서 사역을 했던 저스틴 마터나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 초기 교부들이 한결같이 사도 요한의 저작설을 의심없이 주장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외적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사이의 신학적 유사성도 사실 넘치도록 풍부하며, 문체의 문제 또한 사도 요한의 저작설을 부정할만큼 결정적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또 저자가 자신에 대하여 특별한 수식을 하고 있지 않고 요한이라만 말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이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는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일 뿐 아니라, 교회들에게 이런 성격의 편지를 쓰고 그것을 읽으라고 촉구할 만큼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할 만큼 영향력 있는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또 본문에서 구약성경을 다루는 솜씨는, 그가 히브리어 구약 본문에 정통한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이었으며, 헬라어 구약성경(70인경)에도 정통한 사람이었을 것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이런 점들에 근거하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으로 사도 요한 보다 가능성이 많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왜 썼는가?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1세기 말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노사도인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가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10절에서,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쓴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이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아 이 책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1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주어 요한에게 알게 하신 것은, 그 종들인 주의 백성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는 말씀을 받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2절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도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주어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지난 주일,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목적은 세상의 위협과 박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유혹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한편, 세상에 굴복하거나 타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며, 마지막 때 심판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위로와 경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타협하지 않고 온 우주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과 어린 양만을 영원히 예배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4. 문학 장르: 묵시+예언+서신
그런데 여기서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런 목적과 의도가 어떤 형식에 담겨 전달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적어도 세가지 형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이 메시지는 묵시적 형식으로 전해졌습니다. 묵시는 계시와 같은 말인데, 주전 200년 경부터 주후 100년 사이에는 유대교에 많은 묵시 문서들이 쓰여졌습니다. 이 묵시문서들의 특징은 마지막 때를 다룬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고,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원론적 배경을 깔고 있으며,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말하는데 많은 상징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유대의 묵시문학은 대개 저자가 본명을 사용하는 대신 가명을 사용했는데 주로 유명한 선지자들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가령, 모세의 승천서, 에녹 1-3서, 바룩 2-3서, 에스라 4서, 베드로의 묵시록, 바울의 묵시록, 도마의 묵시록, 그리고 이사야의 승천서 같은 것들입니다. 아마 이것은 문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요한계시록이 당시의 묵시문학형식과는 큰 차별성을 가지고 있기에 묵시문학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묵시적 성격을 가졌다는 정도로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예언은 묵시(계시)와 아주 뚜렷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는 말입니다. 굳이 구별하자면 묵시는 심화된 예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사실 이렇게 본다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중 1% 정도 만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선지자들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기본적으로는, 미래 일을 예측하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예언서(선지서)들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예언서들도 사실 묵시와 예언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구약 선지자들의 관심은 예언적 권면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언적 사실을 전하는 데 있었습니다. 늘 무시당하기 쉬운 전자는 사실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장르적 성격은 하나 더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태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2-3장에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고대의 서신 형태로 쓰여진 책입니다. 여기에는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수신자인 일곱 교회를 언급하며(1:4,11), 첫 인사(1:5)와 마지막 인사(22:21)가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태로 쓰여진 성경입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요한계시록은 묵시와 예언 그리고 서신의 형태를 혼합한 장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은 묵시와 예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회를 위한 서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5. 요한계시록 해석법들
이제 더 살펴볼 주제는 요한계시록 해석법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요한계시록은 많은 상징들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 상징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기독교 역사관과 역사 해석을 포함하고 있는 책이기에, 시대 마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법이 달라지기도 했다는 것은 흥미롭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과거주의적 해석, 미래주의적 해석, 역사주의적 해석 그리고 이상주의적 해석이 그것들입니다.
먼저 과거주의적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예루살렘 멸망(70년)과 로마제국의 멸망(476년)으로 성취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당연히 이 입장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인 60년대에 요한계시록이 쓰여졌다는 초기저작설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이 입장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에 묘사된 결정적 승리가 한 번도 역사 속에서 성취된 적이 없는 사탄의 완전한 멸망, 악의 최종적 파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 최종 심판과 같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미래주의적 해석입니다. 미래주의자들은 1~3장을 제외한 4장 이후의 모든 예언은 역사의 마지막 즉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이루어질 일들이라고 봅니다. 세대주의가 이 입장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미래주의 입장은 요한계시록의 1차적 독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번째는 역사주의적 해석입니다. 역사주의자들은 일곱인 심판시리즈가 시작하는 6장부터 그리스도의 재림(19:11)까지의 본문은 교회사 전체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13장에 등장하는 짐승의 존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해석이 해석자마다 자기 시대의 인물로 해석하는 경향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즉 짐승은 로마 교황도 됐다가, 뭇솔리니나 히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주의 해석 역시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이 주는 메시지를 바르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네번째이자 마지막은 이상주의적 해석입니다. 이상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장면들은 특정 시대의 특정 사건들을 가리킨다기 보다 교회사의 모든 시대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본 원리를 보여준다고 이해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역사 속에서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 모든 신자들을 향한 적실성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입장은 어떤 특정 시대의 역사적 성취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또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해석의 입장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등장합니다. 이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하나님을 모독하며 온 세상이 자기를 경배하도록 미혹합니다. 이 짐승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하여 각 해석의 입장이 구별됩니다. 과거주의자들은 짐승을 기독교를 박해하고 황제를 숭배하도록 요구한 로마황제로 이해합니다. 반면 미래주의자들은 짐승을 미래의 적그리스도, 데살로니가후서 2:3-12에 묘사된 불법의 사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들에 의하면, 짐승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존재입니다. 또 역사주의자들은 짐승에게서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한 로마 교황을 봅니다. 끝으로 이상주의자들은 이 짐승이 언제 어디서나 기독교를 위협하는 모든 국가와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해석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물론 이런 해석의 차이들로 인해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또한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존재가 있겠지만, 두려워말고 굴복하지도 말며, 오직 주 너의 하나님,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 세상을 이기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네 가지 해석의 입장은 모두 장점과 한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현대의 적잖은 요한계시록 학자들은 절충주의의 입장을 취합니다.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적 해석을 취하면서도, 일부 내용이 그리스도의 재림, 원수에 대한 최후 승리, 천국의 완성 같은 미래 사건을 가리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의 관점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상고할 것입니다.


6. 구약성경 인유(引喩)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서론격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을 다 살펴보았지만, 끝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어느 성경보다 더 많이 구약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요소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이유를 그랜트 오즈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 성경구절을 직접 인용한 실례는 전혀 없지만, 다른 어떤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을 훨씬 더 많이 인유하고 있다. 이런 인유들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는데 필수적 역할을 한다. 어떤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요소들은 구약성경의 인유를 통해 온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총 404절인데, 이중 278절이 구약을 인유하는데 구약 인유 횟수는 총 500회가 넘습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 전체가 구약 본문을 언급하는 것이 200회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약 인유는 이사야에서 122회, 시편 97회, 에스겔 83회, 모세오경 82회, 다니엘 74회, 소선지서 73회, 예레미야 48회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분량이 비교적 짧은 다니엘서에서의 인유 횟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장, 다니엘서에서의 구약 인유의 한 예를 우리는 1:1에서 보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언급합니다.
이 어구는 다니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다니엘 2:28-30을 보지요. 28절에서는 ‘후일에 될 일’, 29절에서는 두 번 반복해서 ‘장래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주는 장면입니다. 45절에도 ‘장래 일’이라는 말이 한 번 더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을 통하여 먼 장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에 대한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주전 6세기의 일입니다. 그러니 메시야에 대한 예언 뿐 아니라, 제국의 흥망성쇠를 거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은 먼 후일에 일어날 일이며, 이 일이 미래에 속했기에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은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을 ‘속히 일어날 일’이라고 수정하여 사용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한은 다니엘의 예언은 이제 이미 성취가 시작된 확실하고 임박한 성취의 때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미래의 최종적 성취라기 보다 지금 이미 그 성취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3절 하반절에서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취의 완성은 주님의 재림에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이 가지는 초점은 성취의 완성의 임박함이 아니라, 성취의 시작 그리고 이 성취가 지속성을 가지고 진행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일들입니다. 이 말은 요한계시록이 말씀하는 일들의 필연성을 시사합니다. 이 일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고야 말 일들입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대로 이룰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니면 말고”하는 식의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이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또 2절에서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의 예언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말인 것입니다.


7. 복있는 사람들
그러므로 이제 이 임박한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3절을 보지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이 구절을 헬라어로 읽어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읽는 자는 단수로 쓰였고,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수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해야 합니다. 요한은 왜 이렇게 썼을까요? 이것은 초대교회 예배 형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지금 우리와 같이 개인이 성경을 혹은 성경의 한 권을 소장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바울 사도가 로마에 편지를 보내면, 그 편지는 교회의 예배 가운데 회중들 모두를 위하여 한 사람에 의하여 읽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여기 ‘읽는 것’은 공예배에서 성경을 읽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공예배에서 한 사람이 요한이 쓴 계시록을 읽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요한은 그 사람을 지목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읽어주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교인들 전체이고, 그 들은 말씀을 지키는 자들 또한 교인들 전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성경을 읽어주는 사람, 그리고 듣는 모든 교인들, 그리고 들었으니 그 말씀을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모든 교인들을 가리켜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읽어주고, 듣고 지키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까? “때가 가까움이라!”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면은 요한계시록이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거나 지적 만족을 주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요한 자신이 밝히듯이,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1). 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2)이며, 예언의 말씀(3)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경 처럼, 하나님의 확실하고도 엄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듣고 흘려보낼 말씀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매주일 듣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읽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복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셔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말씀은 윤리적 의무를 포함하는 말씀들입니다. 사도는 요한계시록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이것을 강조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복이 있다는 이 선언은 요한계시록 전체에 7번 나오는데 1장 3절은 그 첫번째 지복 선언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14). 아무쪼록 이 모든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