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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 승리하신 그리스도, 예배하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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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 승리하신 그리스도, 예배하는 순례자

요한복음 16:33, 요한일서 2:1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7-21

말씀내용
오늘부터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중에서 가장 접근이 쉽지 않은 성경에 속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일종의 판타지 소설 형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많은 상징들 때문에 어렵다고 느끼기 쉽고, 또 심판의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무섭다는 인식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한계시록이 다루는 종말론이라는 주제는, 호기심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끌림이 될지 모르지만, 그저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다지 끌리지 않을 수도 있는 주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이 성경이 성도가 믿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특별히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 가려다가 이모저모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할 뿐 아니라, 또한 달콤한 속임수로 넘어뜨리기 위해 모든 거짓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제공해줄 듯이 다가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성도는 어떻게 위협에 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달콤한 속임수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다른 모든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순례자들로 이해합니다. 이 땅을 지나가는 순례자인 성도들은 세상에서 이 모습, 저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거나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천로역정 강해를 통해서 이것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 본질은 분명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 알고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1세기 말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교회를 향한 박해가 로마 전역으로 퍼져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만이 소망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는데, 주님은 재림하시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뭔가 착각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잘못 된 것을 붙잡은 것입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새 힘을 얻어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아직 재림하지 않으시지만, 이미 하늘에서 온 세상을 당신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다스리고 계시는 왕이라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하늘의 관점입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성도들은 주님을, 그리고 교회인 그들 자신을 새롭게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성도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눈을 들어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하늘의 관점과 함께 영원의 관점으로 성도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교정해 줍니다.
둘째로 이런 형편에서 살아가는 순례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요한계시록은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배가 순례자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또한 얼마나 힘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성도는 예배하는 순례자입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 땅에서나 영원 속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보다 후일 그곳에서 더욱 이 의미를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다룰 중요한 메시지를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보라)이고 둘째는 (우리는) 예배하는 순례자 라는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두 중요한 주제들을 요한복음 16:33과 요한일서 2:15~16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승리하신 그리스도 (요 16:33)
먼저 요한복음 16:33을 보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메시아로서 당신의 구속 사역의 의미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중 오늘 이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제자들은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침울해졌습니다. 근심이 드리워진 이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근거는 당신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불안한 마음을 걷어내고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26-27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6-27).”
이것은 기도에 관한 말씀인데,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중개하여 하나님께 대신 올려드리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인 줄 알았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기도를 직접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부재 상황이 올 텐데, 그때 제자들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증과 확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가시고 환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흩어질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32절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하지만 주님은 혼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요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마 26:39)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수 있으셨던 것도,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이것은 얼마나 깊은 확신입니까? 그리고 이런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지금 당신께서 가지고 누리셨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제자들이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지라도 담대하고 평안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의 성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근심 걱정에 이르게 할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거나, 우리 삶에 곤고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약속된 것은 도리어 환난이라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런 환난 속에서도 제자들은 담대할 수 있고, 주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근거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33절은 적어도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17장에서 주님이 아버지께 기도 드리시고 그 기도를 마칠 즈음, 로마의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맺으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어떤 의미입니까? 이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마귀가 권세를 주장하는 죽음을 죽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한 직후에 뱀에게 말씀하신대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실 것입니다(창 3:15). 이것은 마귀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뜻으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그들의 주님께서 무력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환난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여기서 이렇게 천명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는 약함으로 강함을 이긴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 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제자들은 환난 속에서 더 이상 담대할 수 없고 굴복할 것이며, 평안을 누리는 대신 불안과 근심에 물처럼 녹아 내리고 말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남기신 이 마지막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해석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패배가 아니라 원수 마귀의 결정적 패배이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결정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승리의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약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마귀의 권세를, 그리고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통치권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강조점입니다.


2. 예배하는 순례자 (요일 2:15-17)
두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세상의 위협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세상은 마치 잠언에 나오는 음녀처럼 교회를 유혹합니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잠 5:3).” 음녀는 이렇게 유혹합니다.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 날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잠 7:13–21).” 이렇게 그 유혹은 달콤해 보이지만, 그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잠 5:4–5)”라고 말씀합니다. 그녀를 따라가는 것은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고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고 새가 생명을 잃어버릴 줄 알지 못하고 빨리 그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잠 7:22-23)”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라는 경고를 듣습니다(잠 7:25). 이것은 다시 야고보서에서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는 경고로 반복되고(약 4:4),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말씀했듯이, 음녀인 세상은 성도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일서의 본문이 또한 세상과 세상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같은 것을 명령합니다. 이 명령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사랑과 아버지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에,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랑과 아버지 사랑은 상호 배타적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마 6:24). 세상과 우리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으로 표현한 것은 놀랍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사랑해서 짓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신자들에게 매력적 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의 전제는 세상과 그 정욕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 상반절 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세상이요, 세상에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모래를 한 움큼 잡는 것이고 바람을 손 안에 잡으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하나 같이 가변적이고 임시적이고 사라져버릴 것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b~8).” 사라지고 말 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고 허무한 일일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먼저 육신의 정욕이라고 할 때, 육신과 정욕이라는 말은 모두 부정적이기 보다는 중립적인 개념들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육신은 종종 우리의 죄성을 가리키지만, 요한 문헌에서 이 단어는 주로 인간의 제한된 몸, 영이신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또 정욕도 주님께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하셨을 때, ‘원하고 원하였다’ 는 말과 같은 단어이므로, 중립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도가 육신의 정욕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지나친 욕구와 애착이 됨으로써 우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입니다. 육신의 필요에 예속된 상태, 식욕이나 성욕 같은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의 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감각에 지배되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식하며 사치에 빠지고 쾌락의 노예가 되며, 도덕적인 면에서 느슨하고 욕정적이며, 재산 사용에 있어서 이기적이고, 영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되 세상적, 물질적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열을 올리는 삶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의 계명을 잊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며 거기에 대해 무관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육신의 정욕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삶의 욕구입니다.
두번째로 안목의 정욕은 눈의 감각에 반응하여 만족을 추구하는 욕구에 이끌리는 삶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보는 것으로 가득하고 우리에게 눈을 크게 뜨고 보라고 말합니다.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을 순식간에 빼앗습니다. 보는 것을 가지고 싶고, 그것을 가지면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이것이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번째는 이생의 자랑인데, 앞의 두 가지가 정욕, 욕구와 관련된다면, 이것은 삶의 태도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생은 영원한 생명과 대조되는 말로, 세상의 삶, 혹은 소유와 재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소유 자랑, 재물 자랑을 의미하는데, 야고보서가 ‘허탄한 자랑’이라고 한 것입니다(약 4:16). 출신, 학력, 직업, 교양, 가족, 가문, 근면, 성공, 명성, 사회적 지위, 영향력, 유명 지인.. 무엇이든지 사람은 자랑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이 다 이생의 자랑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눈을 감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를 붙잡고 거기에 목을 매는 삶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해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만족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정조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요한계시록은 이런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이며 이 대답은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A.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다.
1세기 말,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전체를 향한 박해가 보편화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 숭배 요구는 점점 거세게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몰아 닥쳤고 교회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고난의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위협하는 고통과 환난과 슬픔을 겪습니다. 우리는 수 없이 넘어지고 힘들어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힘에 압도당하고 주눅이 듭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싸우셨고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 습니다 (골 2:15). 승리하신 주님은 지금 하늘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땅과 하늘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김은 십자가를 통한 이김이었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궁극적 승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서 승리하고, 주님의 현재적 왕 적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역설을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요 16:33). 환난 중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만 예배하라.
두번째로, 우리는 매력적인 음녀처럼 찾아오는 세상이 우리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1세기 말 소아시아에 사는 성도들은, 상업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무역 조합의 수호신들에게 공개적으로 충성을 표현하도록 요구 받았습니다. 대개 연중행사로 행해지는 이 만찬에서, 상인 조합에 속한 그들 모두는 지역 수호신들을 예배하도록 요구 받았을 것입니다. 소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타협에 어느 정도 무릎을 꿇어야 하는 유혹을 직면했던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낫고 더 감각적이고 더 만족스러운 삶을 약속합니다. 한번만 타협하면 더 나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21세기의 형편도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더 다양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세상은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굳이 신앙을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 신앙 생활을 하되, 가끔씩은 여기에 와서 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과 성공과 외모와 성취를 사랑하고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유혹에 직면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비할 수 없는 영광을 보여줍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2–13).”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만물 피조물들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지금은 많은 수가 아닌 우리가 주일 아침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뿐이지만, 우리가 예배하는 이 하나님은, 하늘 위, 땅 위와 땅 아래 그리고 바다 위와 바다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려야 하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모든 성도들에게, 매주일, 매일 그 하나님을 내가 섬긴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천상의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게 될 때까지, 이 땅에서 드리는 너희의 예배가 영광스러운 예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않을 것이고, 우리 앞에 매력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든 세상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그런 세속의 아름다움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잠깐 있다 없어질 것에 목을 매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인 천성을 향해 가며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난과 유혹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 교회를 향한 주님의 편지입니다. 위로와 격려, 그리고 장래의 영광스러운 소망이 가득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오늘 환난과 유혹을 직면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소망과 위로와 새 힘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대하고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