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에바브로디도!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에바브로디도!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벧샬롬 교회 단편설교 - 에바브로디도!

빌립보서 2:19-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6-16

말씀내용
에바브로디도! 이 사람을 아십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베드로나 바울 혹은 디모데 처럼 알려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성경 인물 중 주연이나 조연급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목할 만큼 충분히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의 배경,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빌립보서의 이 본문은 교리적 내용이거나 교훈적 내용이라기 보다 바울 사도의 개인적 상황과 그의 인간적 심정을 잘 드러내주는 본문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빌립보서의 핵심 본문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서는 교리서가 아닌 사도 바울의 편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내용이야말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가슴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주는 대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이 어떤 문맥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무엇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었는가 하는 큰 그림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성경 본문을 공부하고 이해할 때 중요한 원리입니다.


1. 빌립보서, 빌립보교회,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요 16:22; 빌 4:14~19; 고후 8:1~5, 16~22; 빌 4:18)
우리가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 중인 상황에서 이 서신들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편지를 쓰는 사람이 과연 비좁은 로마 감옥에 투옥된 사람이 맞나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쓰는 바울 사도의 시야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말하고 역사의 끝을 넘어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사실, 이 서신의 수신자였던 빌립보의 성도들도 이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서신 전체에서 바울 사도는 16번에 걸쳐 기뻐하라, 혹은 기쁨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투옥된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쁨에 대해서 말합니다. 당연히 그가 말하는 기쁨은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자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결코 감옥이라는 환경이 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요 16:22).
이와 같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져다 주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을 영광스럽게 하고 부요하게 합니다. 사도는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빌립보 성도들이 이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고 자신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큰 주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배경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와 가졌던 특별한 관계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의 말미에서 언급했듯이, 예루살렘에서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기 전에 있는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방인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빌립보교회는 그가 세운 많은 교회들 중에서도 좀 특별했던 교회였습니다. 빌립보서의 분위기는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것이라기 보다, 빌립보교회가 바울 사도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러 차례 바울 사도에게 연보를 보냈습니다. 빌립보서 4:14~19을 보지요.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교회는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 사도를 위해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들은 처음부터, 바울 사도의 사역에 물질로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것이 특별했을 것은, 빌립보가 속해있던 마게도냐 지방은 특별히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고후 8:1~5). 그들은 가진 것이 많아서 내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가난했음에도,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역에 참여하는 특권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번이 아니라 거듭 바울 사도의 사역에 참여했습니다. 가난한 교회의 후원을 받은 사도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래서 사도는 그들의 연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들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시도록 기도합니다.
특별히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 빌립보교회가 보낸 것은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돈을 영치금 정도로 이해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시 로마 감옥은 죄수들에게 음식과 의복, 또 의료적 돌봄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천막을 지으면서 생활을 했던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음식과 의복 등 기본적 필요를 위한 재정이 필요했고 빌립보교회는 그 기본적 필요를 충당하도록 돈을 모아 보낸 것입니다.
돈은 온라인으로 송금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가르친 원칙대로, 재정을 2~3사람 편에 보냈을 것입니다(고후 8:16~22). 그 대표가 아마 에바브로디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4:18에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풍족하니”라고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단지 돈 심부름 만을 위해 1300 킬로미터(800마일)이나 떨어진 로마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 감옥에 투옥된 바울 사도의 시중을 들며, 모든 필요들을 채워주라고 빌립보교회의 보냄을 받아 온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어쩌면 감옥에 갇힌 바울 사도와 함께 죄수처럼 감옥에 들어가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감옥 근처 여관에 숙소를 잡고 하루 한 두 번 감옥의 바울 사도를 면회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욱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헌신입니다. 과연 누가 이 일을 감당하려고 1300 킬로미터가 되는 먼 길을 가겠다고 했을까요?
이런 에비브로디도의 헌신은, 교회사의 한 시대에 선교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드렸던 모라비안 신도들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모라비안 신도들은 지금의 유럽 체코에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종교개혁 이후에 지속되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의 고향이 로마 카톨릭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되자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지금의 독일 땅으로 들어가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1722년의 일입니다. 이 작은 난민 공동체는 1727년 예배 가운데 사도행전 2장에서와 같은 성령의 부어짐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이후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기도와 행동에 자신들의 삶을 드리게 됩니다. 그 중 알려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남미 카리브 연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 기회는 그 지역으로 가는 노예선에 자신들을 노예로 팔아서 가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몇 사람은 자원하여 자신들의 인생을 노예선의 노예로 팔아 복음 없는 그 민족에게로 갔습니다. 저는 에바브로디도를 보면서 그들을 떠올립니다.


2. 사도 바울이 처한 상황(빌 1:14~15, 17~18)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또 하나 간단히 살펴야 할 것이 있는데, 바울 사도가 처한 물리적, 심리적 상황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갇힌 죄수였습니다. 그가 로마 감옥에 갇히자, 바울 사도에게 경쟁의식을 느꼈던 연약한 교회 지도자들이 “기회는 이 때다” 하며 열심히 전도에 힘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서 1:14~15을 보지요.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것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비록 그들이 자신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알고 순수하지 않은 경쟁의식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동기야 어떠하든 그리스도가 전파되기에 기뻐한다고 말합니다(1:17~18). 이것이 감옥 밖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일어나던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형편을 듣고 싶어합니다. 빌립보교회의 형편을 들으면 자신의 적적한 마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8). 참된 교제가 그리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형편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는 디모데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20~21). 많은 사람은 다 자기 일을 구하지만 디모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사도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디모데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 사도에게 빌립보교회가 보낸 에바브로디도가 온 것은 정말 큰 위로였을 것입니다. 보낸 재정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는 바울 사도를 향한 가난한 빌립보교회의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처한 물리적, 심리적 상황이 이러했습니다.


3. 세 사람(2:1~11; 마 26:37; 막 14:33)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 사도 자신과 바울의 영적 아들과 같은 디모데, 그리고 빌립보교회가 바울 사도를 섬기라고 보낸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여러분은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앞에서 바울 사도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중요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2:1~11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리고 그 낮아지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구속 사역, 죽기까지 복종하여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는 성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알고 그를 알며 그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하며 우리 안에 참된 하늘의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도가 자신을 이 범주에 넣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세 사람 모두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범을 드러내 줍니다.
바울 사도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렇게 표현됩니다. 19절에서 그는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싶은 자신의 바램을 표현하면서 ‘주 안에서’라고 씁니다. 그리고 24절에서도 그는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 빌립보 교인들을 보게 될 것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주 안에서’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단지 바울 사도의 말버릇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모든 바램,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또한 복음으로 종노릇한다고 말합니다. 22절에서 사도는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바울 사도의 영적 아들임에도, 바울 사도는, “그가 나를 잘 섬겼다”고 하지 않고, “그가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말합니다. ‘수고했다’는 단어는 직역하면 ‘종노릇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사람들을 복음으로 섬겼습니다.
이 것뿐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내는 일 뿐 아니라, 자신을 섬기려고 로마까지 그 먼 길을 왔다가 병이 든 에바브로디도를 이제 빌립보로 다시 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 자신에게는 자기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이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합니까? 에바브로디도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바울 사도는 그를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28).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형제들의 유익,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은 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두번째 인물은 디모데입니다. 사도는 디모데를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21). 사람들은 다 자기 일을 구하는데 여기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구하기 보다,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20).”고 말합니다. 사도의 곁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사도는 디모데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할 사람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우선이고, 그래서 복음으로 교회를 진실하게 섬기는 디모데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에바브로디도는 어떻습니까? 그는 바울 같은 사도도 아니었고, 디모데처럼 목회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청년부의 한 지체였을지 모릅니다. 그는 빌립보교회의 보냄을 받아 바울 사도를 섬기려고 먼 길을 왔지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거의 죽을 만한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된 중에도 자기가 병들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빌립보교회에 전해짐으로 교회에 염려를 끼치게 된 것을 인해 심히 근심했습니다(26). “심히 근심했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 ‘슬퍼하셨다’고 하셨던 그 단어입니다(마 26:37; 막 14:33).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 두 경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렇게 교회를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처럼 그도 자기 일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30절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죽기에 이르러도’라는 말은, 앞에 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할 때 사용된 것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사도는 의도적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추켜세우며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세 사람을 봅니다.


4. 에바브로디도! (딤후 2:3~4)
우리는 이 세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에바브로디도를 좀더 주목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만큼은 바울 사도나 디모데가 아니라, 에바브로디도가 주연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만큼이나 그가 병들어 죽게 된 일은 사도를 크게 낙심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사도는 자신에게는 큰 손실이겠지만, 그를 다시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 에바브로디도를 유난히 치켜세웁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는 실패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로부터 위임받은 사역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는 말은 모두 5가지입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사도는 그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한’ 동역자(fellow worker)라고 부릅니다. 사도는 그를 자기 수하라고 말하는 대신, 역할은 다를지라도 같은 형제이고 같은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사도는 에바브로디도는 ‘함께 군사된 자(fellow soldier)’라고 조금 더 말합니다. 그가 병들어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울 사도를 섬기라는 빌립보 교회가 맡긴 일을 감당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30). 후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이 말을 쓸 때, 바울 사도는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정말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였습니다.
사도는 두 가지를 더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사자—빌립보교회가 보낸 사람—로서, 바울 사도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는 사자라는 말을 쓸 때, ‘사도’를 의미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썼습니다. 물론 일반적 의미로 사용한 것이지만, 한편 에바브로디도와 그의 사역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에바브로디도는 죽을 병에서 어느 정도 회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27). 하지만 그를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내는 것이 빌립보교회의 기쁨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사도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염려도 있습니다. 혹시 에바브로디도가 이런 상태로 너무 일찍 돌아가게 됨으로써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일 것입니다. 병들어 일찍 오게 됨으로써 그의 사역을 실패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선교역사를 보면, 선교사역의 현장에서 병든 몸으로 귀국해야 하는 선교사들이 있었고 또 있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2년에 영국을 떠나 선교지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후 40여년 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한 번의 안식년도 없이 인도 사람들을 섬기다가 73세의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땅에 묻혔습니다. 이런 그의 삶에는 깊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인도에 도착하고 오래지 않아 아들 피터가 병에 걸려 죽게 되고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그의 아내 도로시 캐리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여 정신질환에 걸려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후 12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녀를 불러가시기까지 정신 질환을 앓는 아내를 돌보면서 윌리엄 캐리는 사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아내의 정신 질환도 그의 복음 사역을 막을 수 있는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웅적인 인물 윌리엄 캐리가 아니라, 그의 아내 도로시 캐리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도로시 캐리는 실패자일까요?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연약함과 그녀가 겪은 정신 질환은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백 수십년전에 이 땅에 복음을 가지고 왔던 의료선교사 존 헤론(John Heron) 을 생각해보십시오.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한 존 헤론은 1885년 29세에 조선땅을 밟았고 1890년 34세에 이질에 걸려 주님 품에 안겨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선교 역사에는 이런 수많은 실패같아 보이는 인생들이 넘쳐납니다.
오늘 본문은 에바브로디도가 실패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패로 보이는 사람들이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는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혹시 이번 목요일에 몽골로 잠시 떠나는 청년들은 그들이 아닐까요? 반년 동안 말레이시아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오늘 돌아온 김남희 자매가 혹시 우리의 에바브로디도는 아닌지?


5. 선교는 서로 사랑의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요 13:34~35; 빌 4:4)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선교는 무엇입니까? 우리 청년들이 이번에는 단기선교여행(비전트립)으로 몽골에 다녀옵니다. 우리는 왜 해마다 이 일을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몽골에서 우리가 만날 선교사님들을 섬길 선물을 위해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런 연보를 드린 여러분이 에바브로디도는 아닙니까?
선교는 무엇입니까? 본문이 가르치는 선교는 무엇입니까? 선교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단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증거가 됩니다. 세상이 우리의 서로 사랑을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 사도를 사랑했습니다. 1300킬로미터를 마다 않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담긴 연보와 함께 말입니다.
바울 사도도 빌립보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신 같은 디모데를 보내고,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교회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사도는 자기의 유익이나 사역의 효율성을 고집하면서 사람의 형편과 감정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디모데를 사랑했고 에바브로디도를 사랑했습니다. 본문은 바울 사도가 그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바울 사도를, 또 빌립보교회를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선교는 이런 것입니다. 선교는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30). 사역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연약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선교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이 교회 안에 넘치게 경험되고,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한 기쁨을 만들어내며, 이 기쁨이 흘러 넘칠 때, 그것이 선교의 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는 내내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기쁨이 선교의 열쇠입니다. 서로 사랑에서 출발해서 교회 안에 그 기쁨이 흘러 넘치게 될 때, 그들의 선교는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의 만족, 이 기쁨의 충만함을 알려주고 싶어서, 전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도록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강력한 복음의 동력일 뿐 아니라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주님이 세우신 교회 마다 이런 교회의 본질이 회복되고, 이 기쁨이 충만해지는 역사가 있기를 구합니다.
이런 방식, 주님이 말씀하신 그 방식 그대로 선교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